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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Dec 14. 2023

고작 연애였던 것

 처음으로 네 목소리 없이 맞이한 아침, 상쾌하기만 하다. 우리의 마지막은 분명 어제였는데 몇 년이라도 된 듯이 후련함이 나를 감싼다. 나는 가슴 시리게 아픔을 느끼며 슬펐고 온몸이 뜨거워질 정도로 화가 났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우리가 헤어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는데 그 오랜 시간이 거짓말이었기라도 한 듯이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오랜 시간 괴로워할 줄 알았다. 모든 순간에서 너를 생각하고 추억하며 후회하고 그리워할 줄 알았다. 근데 너 없는 시간이 너무 평화롭다. 여유로움을 즐기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랬구나. 너와 함께 한 시간에서 나는 알게 모르게 힘들어하고 있었다. 내 시간을 줄여서 너에게 주었고 나의 편함을 너에게 내어주고 나의 선택을 없애서 너의 선택을 들어주었다. 그래, 내가 너에게 행한 배려는 나에 대한 희생이었다. 어쩌면 헤어지길 잘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동안 너와 함께 만들어낸 추억들 중에 행복한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너 때문에 힘들었고 슬펐고 아팠던 기억들만 맴돌아 너를 쉬이 잊게 해주려고 하는 듯하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내 삶에서 네가 빠져도 알아서 해는 지고 달은 뜬다. 오늘 하늘에 커다란 보름달이 떴다. 지나치게 밝은 밤이다. 괜히 달을 구경하려 산책을 나섰다. 적당히 선선한 공기가 나의 산책을 응원하듯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목적지 따위는 정하지 않았다. 그냥 집 앞의 산책로를 무작정 걸었다. 앞보다는 위를 보며 걸었다. 지나치게 밝아서 차마 마주할 수 없던 해와는 다르게 은은한 빛을 머금은 달은 나와 눈을 맞춰주었다. 아무렇게나 내가 걷고 싶은 대로 걸어도 나를 잘 따라와 주었다. 햇살은 나를 도망칠 수 없게 붙잡고 있었지만 달은 곁에 머물기만 했다. 해는 길었다. 달은 짧다. 그래서 더욱 남는다.


 잊은 게 아니었구나. 너무 강하게 남아있던 너의 매몰차고 시린 감정이 나에게 깊이 박혀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지 못하게 하고 있던 거였구나. 조금씩 위에 칠해진 진한 페인트가 지워질수록 속에 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의 모든 순간에 너는 남아있었다. 지금 달을 보며 걷는 시간에 모든 순간에 묻어있다. 처음 너를 만난 순간부터 계속해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 매 순간 있었던 감정은 아름다웠다 분명. 지나치게 밝았다. 강렬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짙게 남을 만큼. 지나치게 짙은 감정이었는데 그런 만큼 밝고 밝아서 투명하다. 너와 나는 서로 마주할 때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서로의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하고 숨기는 것을 잘못하고 매 순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서운해했다. 너무 서로를 원했다. 그 행복했던 시간들이 산책로를 한걸음 걸음 걸을 때마다 생각난다. 너에게 마음을 가지고 용기 내어 사랑을 전하고 행복한 시간을 함께하고 매 순간 밝았던 시절들이. 너와 함께 한 시간은 분명 3년을 넘기는데 추억하는 시간은 3분이 되지 못한다. 지나치게 밝았던 탓일까, 잠깐의 어두움들이 더욱 튀어나온다. 빛이 더 많았었는데 어둠이 더 깊게 나온다. 네가 나를 아프게 한 것을 생각하고 내가 너를 아프게 한 것을 생각하니 3시간도 충분치 않았다.


 얼마를 걸었는지 몰라서 일단 앉았다. 아까의 상쾌한 공기는 어디로 갔는지 차가운 바람이 내 몸 구석구석에 맴돈다. 감기에 걸릴 것 같다. 지독히 아프고 오래갈 것만 같다. 어차피 내일도 일어나 눈을 뜰 때면 또 너의 목소리는 없지만 상쾌하기만 하겠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한 것은 너를 사랑했던 나였지 너를 아프게 한 나는 아닐 테니까. 내가 사랑했던 것은 나를 보며 웃던 너였지 나를 보며 울던 너는 아닐 테니까. 나는 너를 찾지 않는다. 너를 기억한다. 과하게 밝았던 사람아, 그렇기에 너무도 어두운 사람아. 너는 나를 어떤 색의 빛으로 기억하는지. 프리즘처럼 투명한 너는 나에게 다가올 때 무지개였고 그 모든 것을 나에게 칠해 새까맣게 변했다. 헤어질 때 말했다. 미안하다고. 그때는 뭐가 미안한지는 몰랐다. 그냥 네가 울어서 내 잘못인 거 같아서 말했다. 그 오랜 시간을 지나와 남긴 마지막 말이 고작 그거 하나였다. 그래서 더 그 말 밖에 없었다. 더 무슨 말을 꺼낼 수 있겠나.


 서로가 행복했으니 되었다. 그렇게 믿겠다. 이제는 나는 행복할 것이다. 더 이상 배려도 희생도 없이 나를 챙길 것이다. 그러니 후련하겠지. 이제 너도 그럴 수 있을 테지. 나를 위한 배려도 희생도 필요 없을 테니까. 그럼 너도 행복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서로 더 이상 아무것도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놓아버린 것이 아닌가. 그 뒤에 찾아온 시간이 분명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행복해야지. 암, 그래야지. 그렇게 살아야지. 그러니 난 너에 대해 미안함이 떠올라도 애써 무시할 것이다. 차라리 너를 욕해버리고 말 것이다. 가끔 너의 추억이 떠오르는 순간들이 찾아올 때는 애써 도망치려 하지는 않겠다. 내가 사랑했던 시절의 너를 부정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겠다. 이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에 있었던 감정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 나는 처음 너를 보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긴 시간 동안 오직 한 사람만을 떠올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꺼낼 자신이 있었던 그때의 네 모습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겠나. 그러니 달을 보며 걷는 시간만큼은 나를 용서해 주길 바란다. 그 외의 시간에는 마지막에 남긴 말 한마디를 계속 품에 안고 지낼 테니까. 너는 나에게 사과하지 말아라. 네가 용서를 건네지 못했듯 나도 건네지 못할 것이니. 내가 너의 사과를 거절하게 하지 말아라. 그게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희생으로 생각해 주어라.


 길었나 짧았나 대보지도 못할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깊었나 얕았나 재보지도 못할 감정이 흘렀던 것이다. 시작을 위해서 많은 것을 고민하고 설레고 떨려하던 그 긴 시간은 사라지고 마지막에 말 한마디만 남은 그런 연애였던 것이다. 대수롭겠는가. 고작 그런 연애였다. 그런 것이다. 밝았던 너는 마음에 묻어두고 어둠을 칠하던 너만 앞에 세워두고 욕하는 그런 한심한 사람만 남은 연애다. 그러니 차마 빛 속에서 너를 꺼내 들지 못한다. 남들도 듣고 보지 못하게 달과 함께 나누겠다. 집으로 향하는 길, 달이 더 이상 따라와 주지 않는다. 분명 오늘은 마치 아침처럼 밝았던 밤이었는데 갑자기 어둠이 찾아든다. 달을 뒤로하며 걷는다. 두려워서 앞보다는 뒤를 보며 걸었다. 멀어지는 빛을 눈으로만 좇으며 걸었다. 빛이 멀어진다. 어둠을 남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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