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me, from us 18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onymous Aug 16. 2017

작아 보이기 시작할 때

군 복무 당시 첫 휴가를 나와, 처음으로 느꼈다.


고작 백일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아버지의 등이 너무나 왜소해 보였다. 일 순간 나는 일종의 ‘책임감’ 비슷한 감정으로 고무되었다.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거라 생각했던, 당연시 여겼던 존재가 극명히 상반된 모습으로 비칠 때의 복잡 미묘한 감정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기억 속의 어딘가를 계속 맴돌게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한 순간들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불쑥 와버렸다. 나는 이기적이었다.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거의 모든 시간 속에서 나는 한낱 미숙한 학생이었기에 부모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희생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부모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것이리라 여겼다. 그 전까지는 정말 몰랐다. 부모도 이름을 가진 개별적 존재임을.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보통 부모를 아빠, 엄마 혹은 아버지, 어머니로 부른다. 딱히 이름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으니 항상 부모로서의 존재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들의 삶과 꿈이 있음을 망각하고, ‘부모’라는 희생적 카테고리 안에 가두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는 자각이 들 때, 우리는 부모의 위대함과 숭고한 희생정신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뭔가를 자꾸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퉁명스럽지만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 또 부모는 자식에게 폐 끼치기 싫다는 그 인자한 표정으로 괜찮다고 한사코 거절하고 또 거절한다.


이십 대 중반을 넘기면서, 부모님에게 화를 자주 낸다. 늦었지만, 아름다운 시기들은 진즉 지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제라도 제발 그분들의 삶을 사셨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를 낸다. 자식들이 드리는 용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행을 가고, 사고 싶은 옷을 사시라고. 그렇게 하셔도 된다고. 그러면 마지못해 ‘알겠어, 너무 고맙다’고 대답하면서 결국엔 내 명의로 된 주택청약 계좌에 돈을 넣으시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어린가 보다. 그분들의 주름은 깊어지고, 흰머리는 늘어만 가는데 당신들의 행복은 안중에도 없고 여전히 나의 앞날만이 창창하기를 기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헤아릴 수 없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그러니까,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때 내가 봤던 아버지의 등은 사실은 작아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비록 물리적으로 작아졌을지언정, 나는 그만큼 위대한 등을 여태껏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전 17화 부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