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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여행 Mar 15. 2023

아이를 향한 온전한 희망

아이의 유일성


우리 집의 유일한 화분, 포인세티아. 올해 크리스마스에 장식으로 산 화분이다. 화분 킬러라는 나의 별명에 걸맞게 풍성했던 포인세티아가 어느 날부턴가 비실비실 말라갔다. 히마리 없이 늘어진 이파리를 볼 때마다 한 때의 치기로 생명을 들인 나를 자책했다. 결국, 화분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을 하였다.

매일 아침, 화분을 요리조리 옮겼다. 거실로 길게 들어오는 햇살을 좇아 빛줄기 한가운데에 두는 것이 내 일이었다. 환기를 위한 창에서 외부의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앙상해진 화분, 몇 없는 이파리들이 바람에 힘겹게 흔들렸다. '이러다 다 떨어져 버리면 어떡하지?' 걱정이 올라올 즈음의 어느 날, 화분에서 빛나는 연둣빛 잎사귀를 발견했다. 흥이 났다.

'어쩌면 내가 죽어가는 화분을 살릴 수도 있겠구나.'

희망을 품었다. 화분을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 안도했다.


"엄마엄마, 이거 봤어? 얘가 갑자기 풍성해졌어."

어느 날, 하교한 딸내미가 흥분하여 말했다.

"걔 다시 살아났어. 이제 본 거야? 며칠 되었어."

화분의 소생에 두 아이들은 기뻐했다.

매일 조금씩 조금씩 받은 햇살에 힘없이 떨어지던 잎이 초록빛 새 잎을 낸다. 그 모습이 기특하기 그지없어 가만히 이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꼭 한 때의 내가 딸아이를 보는 모습 같다.

비실비실하고 죽어가는 이파리가 창피해서 누가 볼까 지레 걱정이 되어 밖에 내어놓기 부끄러웠다. 너무나 논리적이고 확실한 주장을 하는 우리 아이를 그저 나 혼자만 보면 안전할까 싶어 자꾸만 안에 가두었다. 그러나 해를 받지 못한 아이는 점점 더 시들어갔다.

타인이 아이를 보는 모습에 초연해지고자 나는 내 안의 알을 깨고 힘겹게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아이는 집 안의 공기만이 아닌 외부의 공기를 맡았다. 세찬 바람도, 사들이는 바람도, 강렬한 햇살도, 부드러운 햇빛도, 강한 폭풍우도, 반짝이며 잎사귀에 내리 앉는 작은 빗방울도. 매일 햇빛을 쬐고 문을 열어 바람도 쐬어주니, 처음엔 시들 거리고 추워 보이던 녀석이 생기를 되찾았다. 아이도, 화분도 그러했다.


"온전히 희망하면 실망하지 않는다. (중략) 희망이란 내 아이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아이가 성장하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희망이란 아이의 성장을 희망한다는 것이고, 아이가 자신의 유일성을 깨닫고 자기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p,62>


희망과 기대를 착각했다. 기대는 실망을 낳을 수 있다. 기대가 실망이 되어 불쑥불쑥 내 안의 미움을 남겼다. 아이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면서도, 아이를 세상에 맞추어 조각하기를 원했다. 아이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내 안의 조건이 줄줄이 늘어났다. 절대적인 사랑이 힘겨워 꺼억 꺼억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아이는 나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절대적인 사랑을 나누어주지 못하는 나 자신도 겸손히 인정한다. 그리고, 그저 희망한다. 온전히. 온 힘을 다하여. 아이가 유일성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이것이 자신의 주장이 확실한 아이를 자식으로 가진 엄마가 된 자의 고백이며, 살면서 자질구레한 말싸움 조차 해본 적이 없 양보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자의 힘겨운 시행착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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