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신기한 경험을 했다. 조금 호감 있던 분과 카페를 가게 됐는데 몽글몽글 맺혀있던 마음이 숑, 하고 사그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묘해서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렇다고 호감이 없어졌다는 건 아니다. 그냥 내 머릿속에 있던 어떤 환상이 사라지고 조금은 다르면서 낯선 누군가가 내 앞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달까.
누군가를 좋아할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요즘 그런 의문이 많이 든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남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사실 나의 다른 모습이고, 내 이해의 지평 너머에 있는 것이 비로소 타자.'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상대방이 상냥하고 배려심이 있어서 좋은 마음이 들었다면 과연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의 품성은 그의 것일까, 아니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내가 다소 호감이 있었던 분에 대한 감정은 그분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내 안에 있었다. 그 사람이 내 옆에 없는 것이 내게 익숙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내 소회는 사실 그와 분리되어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다 그 분과 같이 있게 되었을 때, 실제로 다가온 느낌은 그 사람을 '떠올렸을' 때 느낀 것과는 달랐다. 좀 더 구체적이었고 더 잔잔했고 더 덤덤했다. 그렇게 내 안의 어떤 추상적인 대상에 대한 느낌이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것으로 교체됐다. 이상하면서 조금 아쉽기도 한 기분이었다.
사람을 좋아할 때 드는 감정이나 생각의 흐름에 관심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그건 내가 3월 중순부터 거의 덕질을 하다시피 해온 어떤 분에 대한 감정 때문일 것이다. (헷갈릴 수 있는데 내가 덕질하는 분과 위에서 말했던 조금 호감 있는 분은 다른 사람이다...ㅎㅎ;) 덕질하는 감정은 한층 더 강렬하다. 많은 것을 그 사람으로부터 영감을 받기도 하고 또 실제로 인생의 방향이 조금 바뀌기도 한다. 그 사람이 하는 작은 제스처나 단어에도 다소 열광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닮고 싶어 한다. 호감이 스쳐가는 바람 같은 마음이라면 덕질은 그것보다는 지속적이고 더 깊은 자국을 남기는 것 같다.
호감이 모호하게 흔들리다 연기처럼 사라지고 다시 실체로 다시 마음에 자리 잡았던 순간이 꽤 인상 깊었다. 왜냐면 내 덕심도 조금은 달라지고 있어서 앞으로 어떻게 이 마음이 흘러갈지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내 덕심도 사실 오랫동안 대상과 접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내가 키워온 마음이다. 대상과 그를 향한 마음이 분리된 지 시간이 꽤나 흘러서인지 요즘은 내가 앓고 있는 상대가 정말 실존하는 사람인지 실감이 안 나기도 한다. 마치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을만한 판국이다.
그 사람의 친절함, 배려심, 선량함, 다정함이 좋다. 그의 생김새도 좋다. 그분의 취약한 점도, 내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들 마저도 좋다. 그것 외에 내가 무엇을 더 고려해야 할까. 내가 그 사람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만의 안경을 끼고 있고 그걸 통해 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내 안의 강력한 감정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그 사람의 존재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로 인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에게 영향받은 감정임은 확실하다.
들뜬 감정을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도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어쩌면 지금 내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가 무언가를 하나의 구(球)처럼 매끄럽게 입체적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환희가 지금 내겐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이 감정으로 인해 삶이 풍성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호기심이 많아졌고 다방면에 많은 관심이 생기고 잔잔한 기쁨이 마음에서 흐른다. 그 사람의 실체가 어떻든, 어떤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든 지금 내 상태에선 그것마저도 그 사람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 것이다. 호감 가졌던 분이 낯설게 느껴진 것처럼 실제로 만나면, 또 대화를 나누면, 식사를 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낯선 기분을 느끼게 될까? 그게 어쩌면 환상이 벗겨지는 순간일까? 그렇게 되면 조금 혼란스러울 것 같다. 아니면 모든 사랑이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호르몬의 장난에서 벗어나 생활의 일부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
왜 그런 기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신기한 메커니즘이다. 사랑에 들게 하는 순간엔 어느 정도의 환희와 환상이 찾아온다. 그건 한동안은 상대의 다양한 모습과 어쩌면 내가 견디지 못하는 모습까지도 품을 수 있는 감정 상태를 만들어준다. 그 후에 흔한 말로 콩깍지가 벗겨지면 그때는 그 사람과의 시간이 일상처럼 평범하게 느껴지는 단계로 넘어간다.
사람들은 아마 콩깍지가 벗겨진 상태가 정상이고 진짜 그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전부를 온전히 사랑하고 싶은 내게는 누군가에게 반한 시간이 더 달가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의 어떤 점이든 둥그렇게 모두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깐 말이다. 실제로 만나게 되더라도 나의 덕심이 연착륙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