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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영이 Mar 20. 2024

나는 민낯이 이쁘다

우울증이란 건 뭘까. 심리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말하는 나지만, 사실 학문적으로는 이 병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내가 아는 건 내가 겪은 것들이 전부다.


그럼에도 내가 글을 쓰는 건 비밀로 꽁꽁 감추던 내 민낯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싶어서. 맨날 화장을 하고 다니면 언제 민낯을 남에게 들킬지 모르니 불안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를 쓰고 공유하며 스스로 채운 족쇄에서 벗어나보려 한다. 비장하게 이유를 쓰고 나니 이렇게까지 비장할 일은 또 아닌 것도 같다. 워낙 흔한 병이니 말이다. 어쨌든 다시 내 얘기로 돌아오면, 나는 내가 자아를 가지기 시작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우울과 함께였던 것 같다.



유난히 나를 괴롭히던 남자애가 있었다. 정말 소문이 자자한 악동이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다른 친구와 싸우다가 상대방의 팔을 뼈가 보일 정도로 물어뜯었다는 일화가 흉흉하게 전해져 내려왔었다. 나는 그때 선생님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는데, 선생님은 나와 그 아이를 돌보는 부담을 나누고 싶었는지 내 짝으로 굳이 걔를 앉혔다. 나는 싫었다. 그렇지만 워낙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었던 (겉으로) 씩씩한 학생이라 꾹 참고 옆자리에 앉았다. 그 애는 내가 가져온 색연필을 내 눈을 빤히 보며 부러트렸다. 아침에 사 온 색종이도 다 오려버리곤 했다. 그중에 제일 견디기 힘든 건 성추행이었다.


나는 어릴 때 부끄러울 걸 다 알고 있는 조숙한 아이였다. 그 애는 수업 중에 책상 밑으로 내 허벅지를 자기 손으로 계속 훑어내렸다. 나는 선생님께 알릴 생각은 하지 못했고 수치심에 괴로워하며 필사적으로 손을 치워냈다. 당연히 말려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창피한 이 상황을 보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그 아이의 손을 꼬집고 비틀었다. 그렇게 날이 쌓여갔고, 나는 정말로 그 아이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저주를 그 아이에게 퍼부어줬다. '나는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 아이는 다시 내 눈을 빤히 보며 말했다. '나는 죽어서 귀신이 되어도 널 따라다닐 거야.'


성 관련 사건에서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고 알리지 않는 일은 빈번한 걸로 알고 있다. 물론 피해자는 수치스러울 일이 없는 게 사실이다. 잘못은 가해자가 하고 있으니까 피해자는 잘못이 없다. 그럼에도 실제로 당하는 입장에선 움츠려드는 것도 사실이다.


방학이 되고 나는 멀리 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방학을 보냈다. 그리고 외할머니 동네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떼썼다. 그렇지만 이유를 모르는 어른들은 당연히 허락해주지 않았다. 나는 방학이 끝나는 게 너무 싫고 무서웠다. 그렇게 내 열 살의 여름이 가고 있었다.


방학이 끝나고 드디어 짝이 바뀌었다. 그 애는 다른 여자애와 짝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짝이 된 여자애가 수업 중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선생님! 얘가 제 다리 만져요!' 나는 그때 충격을 받았다. 나는 왜 저러지 못했지? 나는 왜 부끄러워했지? 나는 왜 당당하지 못했지?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이해한 우울은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비난하고 있을 때 잘 찾아온다. 내가 왜 어린 나이에 나 자신을 공격했는지, 성추행 피해자인데도 힘듦을 어른들에게 털어놓지 못했는지, 나 자신을 충분히 감싸주지 못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 와서 아는 건, 다행히도 나는 이제는 도움을 구할 줄 알고, 나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을 구분할 줄 알고,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어느 정도 감싸줄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거다.


나와 함께 하는 이 우울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진행이 되었고,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를 과거를 돌아보며, 또 가능하다면 심리학적으로도 성찰해 보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읽기에 가볍지 않은 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쓰면서도 나 자신에게 상처 주지 않는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 신중하게 써 가게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우울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아니면 삶이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내 경험들이 공감을 준다면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내가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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