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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영이 Mar 20. 2024

'정상'을 연기하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정상인으로 보일지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그러니까 내 우울과 불안이 혹여나 티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살았단 말이다. 사실 당장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다. 동호회에 갔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긴장되지 않고 사람들이 다 반가웠고 마음이 편안했다. 너무 마음을 놓아서 그랬을까? 모임이 끝나고 식사 자리에서 나만의 사투가 벌어졌다. 나는 성취와 관련된 자존심이 센 편이다. 아마도 공허한 자아를 채우기 위해 좋은 성적, 좋은 학교, 사람들의 감탄에 오래 집착해와서 그럴 것이다. 영어 강사인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약간 내 영어 실력을 무시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부터 세상이 내게서 페이드 아웃 되듯 멀어지고 나만의 사투가 벌어졌다.


우선 나는 기분이 상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근데 동시에 내가 자존심 상했다는 걸, 내가 그렇게 취약한 사람이란 걸 티내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나는 '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하고 동의하는 척 했다. 그렇지만 나는 쉽게 상처 받아버렸고 기분이 다운됐다. 말을 하기 싫어졌고 발언을 한 사람에게 마음이 급격하게 닫혔다. 그럼에도 나는 '정상인'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 때부터 애를 써서 연기를 했다. 괜히 분위기 망치고 싶지 않아서 일단 상한 내 마음은 저리 치워야 했다.


치워져서 마음이 더 서러웠나 보다. 시간이 갈수록 기분이 더 나빠졌고 넘치던 에너지가 소진되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금방 사람들과 헤어져서 혼자 있을 수 있게 됐고, 내가 반복적으로 '기분 나쁠 일이 아니야, 기분 나빠할 말이 아니야, 자존심 상하는 말일지언정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빠질 건 없어.' 하며 내 감정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걸 알게 됐다. '아, 기분 나쁠 수 있지.' 하고 나니 어느 순간 진정이 됐다.


내 추측으로는 감정은 회피하고 누를수록 더 튀어올라 커지고 결국 내 활기를 뺏어갈 만큼 거대하게 나를 압도하는 것 같다. 오히려 '아, 내가 이렇구나!'하고 안아줄 때 감정은 잦아든다.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건 내 방어기제가 일단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절에 있을 때, 아무 이유 없이 며칠 동안 아주 우울했다. 나 자신이 싫어지고 기분 나쁨이 지속됐다. 점심 공양 시간에 보시로 들어온 코스트코 머핀을 입으로 뜯어먹다 문득 너무 복받쳤다. 그래서 발우를 팽개치고 요사채 뒷마당 밭으로 뛰쳐나갔다. 뛰면서 울었다. 너무 억울했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을까? 왜 나는 정서가 이렇게 불안정할까? 엉엉 울면서 뛰며 잡초가 가득한 땅을 내디뎠다. 그러다 갑자기 '아! 나는 그저 장애인분들이 한쪽 팔이 없듯이 마음 어딘가가 아픈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처음으로 내게 우울증이 불안장애가 있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었다. 뭐 인권 변호사든 멋진 글쟁이가 되든 어떻게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사사건건 내 마음이 방해였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동기에게 인사하는 것도 말을 더듬고 자꾸 방으로 숨어들게 했다. 그래서 나는 내 비정상성을 정말 떼어내고 싶었고 내 병들을 아주 미워하게 됐다.


요사채 뒷마당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땅 속에서 지렁이가 아무도 모르게 흙을 깨끗이 하듯이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잡초를 뽑더라도 세상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고. 그런 깨달음에 눈물이 기뻐졌다.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는 정상처럼 보이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서 발버둥치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래도 다행히 나는 예전만큼 내 우울과 불안을 미워하지 않게 됐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어 믿지 않는 무명의 절대자에게 절절하게 당신만은 나를 이해해 달라고 글을 쓰던 내가 이제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시간은 걸리지만 말이다.


오늘도 열심히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내 결핍마저 사랑해 줄 사람을 나도 너도 찾아 헤매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내가 아닐까 자주 생각한다. 세상에 알고 보면 '정상'이라고 할 만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모두가 나처럼 작게 또는 크게 사투 중이지 않을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비정상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세상에 타자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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