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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커피 Jun 26. 2019

순례길 끝나고 산티아고에서 했던 일 열 가지

산티아고 순례길(포르투갈길)을 마치고 이틀간의 여정

2008년 8월 4일부터 13일까지 총 열흘간 카미노를 걷고 나서, 8월 14일, 8월 15일을 산티아고에서 지냈다.


대다수의 남들과 다르게 포르투갈길을 걸어왔어도 막상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서는 다를 바 없다. 더 이상 도보 순례자가 아니라 그냥 여행자가 된 기분이랄까. 아무튼, 순례를 끝낸 다음 날부터 산티아고에서 이틀간 무엇을 했는지 정리해 본다.



8월 14일


1. 늦잠자기

새벽부터 일어나 걸을 일 없으니 늦잠을 실컷 잤다. 전날 네이버 카페에 예고한 대로 Cafe-Bar Obradoiro라는, 오브라도이로 광장 바로 입구 카페에 앉아 순례자 미사에 같이 갈 한국인이 혹시 있으려나 하고 기다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뭐,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숙소가 그 카페 위층이라 카페에서 아침식사 겸 앉아 있었으니.

다시 혼자, 아침식사

아침 식사로는 카페콘레체, 또르띠야(계란 요리)를 시켰다. 메뉴에는 한판 값이 쓰여있어서 어 비싸다 싶었는데, 점원이 알아서 1/4조각만 갖다 주고 값도 싸게 받네. 더욱이 빵은 공짜. 이렇게 고마울 데가. 


2. 순례자 미사에서 불러주는 순례자 명단 듣기 

식사를 마치고는 바로 앞 산티아고 대성당에 들어가, 정오에 시작하는 순례자 미사에 참석했다.

대성당을 지키고 있는 야고보 성인, 스페인어로 Santiago

미리 알고 있던 바로는, 미사 중에 그날 오전까지 도착한 순례자 명단을 불러준다기에 내가 불리는지 귀 기울여 들었다. 순례자 개인의 이름은 안 불러주지만 순례 출발도시별로 국적과 사람 수를 불러주는데, 기다리던 "포르투에서 출발한 한국인 한 명"을 끝까지 못 들었다. 명단에 당일날 오전 도착한 사람만 집계하고 전날 오후 도착분은 빠지는 건지? 아니면 뭔가 누락된 사유가 있었는지...... 

산티아고 대성당, 순례자 미사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좋았던 것은, 특별한 날에만 움직인다는 향로가 이 날 미사 중에 날아다녔다는 것이다. (사진에 보면 제대 위 은색으로 된 향로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왜 대축일도 아닌 이 날 움직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순례자 미사까지 참석했으니 정말로 순례길을 마무리 한 기분이 들었다. 


3. 혼자 골목길 돌아다니기

이제는 본격적으로 순례자가 아닌 여행자, 혹은 관광객이 될 차례! 


성당 주변 시가지를 기웃기웃 돌아다니며 오래되었지만 멋진 시가지를 구경하였다. 누가 어디 가라는 사람도 없고, 그냥 내 마음대로 발길 닿는 대로. 그러다 배가 고파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보카디요, 스페인식 샌드위치

점심은 근처 카페에 혼자 앉아서 스페인식 샌드위치인 보카디요를 먹었다. 순례가 끝나고 혼자가 되니 내가 먹고 싶을 때 내 마음대로 아무 데나 들어가서 먹으면 된다는 것은 좋지만, 유럽인 동행이 있을 때처럼 세밀한 주문은 불가능하다는 점은 나쁘다. 스페인어 메뉴판을 보며 대충 그간 유럽인들 사이에서 눈치껏 배운 스페인어를 동원하여 초리소, 레추가, 토마떼 넣어 달라고 시켰더니 다행히 햄, 양상추와 토마토가 잘 넣어서 나왔다. 


점심 먹는 중간에 지나가던 다른 순례자가 합석하여 잠시 이야기 나누었다. 벨기에인과 네덜란드인 순례자였는데 프랑스길을 걸었단다. 같은 순례자들이라 공통의 화제가 있으니 짧지만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산티아고의 어느 골목

그들과 인사하고 다시 산티아고 골목을 혼자 걸어 다니는데, 가족 생각이 참 많이 났다. 특히 길에서 만나는 유모차나 어린 아기들이 어찌나 눈에 들어오던지... 현관문에 서서 딸과 작별인사하던 순간이 생각났다. 아빠가 여행 가니까 며칠간 못 볼 거라는 말에, 아직 여행이 뭔지도 모르는 20개월 딸아이가 "ㅇㅇ이도 여행!"이라며 아쉬움을 표현하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이제 삼일 후면 한국에 돌아가서 만나게 된다!


4. 길거리 공연 즐기기

점심 때문에 카페 야외 자리에 앉아있을 때 건너편 길가에 바이올린/첼로 협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참 듣기 좋았다. 다 먹고 일어설 때 공연자에게 1유로라도 보탤까 싶었는데, 내가 다 먹기 전에 일어나더만. 산티아고 중심가를 돌아보다 보니 이런 식의 길거리 공연이 참 많아 즐거웠다. 

Quintana 광장
Quintana 광장의 공연

대성당 앞의 오브라도이로 광장을 기준으로 성당 뒤쪽 건너편에는 퀸타나 Quintana 광장이 있다. 여기서 종종 이런저런 공연이 벌어지는데, 특히 위 사진의 판토마임이 벌어질 때는 한참을 앉아서 구경할 만큼 재미있었다.


5. 기념품 쇼핑하기

원래 나는 그다지 쇼핑 즐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몇 가지 간단한 기념품 쇼핑을 해봤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상징하는 티셔츠 몇 벌, 조개 목걸이, 십자가 목걸이, 기타 팔찌. 뱃지 등등... 대성당에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신 어머니 드릴 묵주도 샀다. 어머니께서 이미 가지고 계신 묵주가 많지만 그래도 아들이 도보성지순례 마치고 사온 묵주라니 좀 특별하지 않을까? (첨언하자면, 산티아고 순례길로부터 9년 후 어머니와 함께한 루르드 성지순례에 이 묵주가 동행했다. 언젠가 이 일에 대해서도 글을 써보고자 한다.)  


그리고 순례길과는 상관없지만 꼭 사고 싶었던 것을 하나 샀다. 5.50유로짜리 모카포트. 3인용이라 크기는 작지만, 이때만 해도 한국에서 모카포트가 귀한 물건이라 같은 크기가 3만 원 이상 했다. 물론 에스프레소 머신은 훨씬 더 비쌌지. 이제는 집에서도 저렴하게 에스프레소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에 넘어온 모카포트는 이후 우리 집에서 못해도 몇 천 잔은 넘는 에스프레소를 뽑아내는 활약을 했다 ^^)

모카포트

그리고 먹고 마실 것도 한국에 사 왔다. 


먹을 것 : Tarta de Santiago, 타르타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사도 야고보)의 파이, 아몬드가 들어가고 십자가 모양으로 설탕 장식을 한, 이 지역에서 많이 먹는 디저트이다. 


마실 것: Aguardiente de Orujo, 아구아르디엔테 데 오루호. 순례길을 마치기 직전, 매일매일 식당에서 이걸 마시던 일행에게 물어봤다, 나 한국 가서 이 술 생각날 것 같은데 가게에서 뭐 달라고 해야 해? 아구아르디엔테 데 오루호! 고마워!

산티아고의 타르트, Tarta de Santiago
아구아르디엔떼 aguardiente


6. 한국말 하기 (응?)

낮에 순례자 미사 끝나고 나와 근처 거리를 걷다가, 포르투 출발 이후 무려 열흘만에 처음으로 한국말을 들었다. 중년 여자분 셋을 스쳐 지나가며 그분들이 하는 한국말이 귀에 꽂혔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까지 반가울 일인가 싶지만, 당시에는 그게 괜히 반가웠다.


이번에는 저녁시간이 가까워져 슈퍼마켓에 음식을 사러 들렸는데, 장 보다가 이십대로 보이는 한국인 자매를 만났다. 낮에 한국말을 스쳐 지나가기는 몇 번 했는데 이렇게 딱 마주치기는 처음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이야기 좀 나누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어디서 먹을까 식당가를 다니다가 케밥집에 앉아 계신 다른 한국인 순례자가 부르셔서 합석했다. 학교 선생님이신데 이 자매와는 이미 전에 지나가다 만난 사이였다. 맥주 두 잔에 되네르 케밥을 맛있게 먹으며 열흘 만에 한국말로 마음껏 대화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되네르 케밥


8월 15일 금요일


7. 또 늦잠자기(에휴) 그리고 장 본 것으로 식사하기

이틀 연속 마음껏 늦잠을 자고 10시에 일어났다.


전날 슈퍼에서 장 본 것으로 숙소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인건비 비싼 선진국들이 대개 그렇지만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역시 슈퍼마켓에서 식재료 파는 것은 엄청 저렴한데, 식당에서 서빙받으며 식사하는 것은 훨씬 비쌌다. 특히 포르투갈은 1인당 GDP 같은 것으로 따지면 우리나라와 큰 차이 없는데 또 이런 면에서는 선진국이랑 비슷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 처음 글을 작성한 2008년 기준의 기록이고, 2019년 기준으로는 이제 남한의 1인당 GDP는 스페인도 제쳤다. 세월 무상하구나.)

여하튼 싸게 산다고 샀던 0.99 유로짜리 토스트 빵은 너무 맛이 없었다. ㅠㅠ 하지만 구세주는 야채 참치! 스페인말로 참치 샐러드라 쓰여있어 샀는데 한국에서 먹던 야채참치 캔과 상당히 비슷해 익숙한 맛이었다. 순례 중 일행과 먹던 것이 생각나 절인 올리브도 조금 샀는데, 엄청 싸다, 0.36유로. 역시 지중해 국가답다. 


8. 대성당에서 날아다니는 향로 보기

12시 순례자 미사에 이틀째 참석했다. 마침 이 날은 성모승천 대축일이라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의무적으로 미사를 드려야 하는 대축일이다. 그래서 그런가, 11:30에 들어갔는데도 앉을자리 없이 사람이 가득해서 나도 서 있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역시 대축일이라 그런지 미사 시작부터 요란하다. 가마에 뭔가 태우고 행진하는 행렬을 시작으로 뒤에 사제들이 뒤따른다. 아니 미사 하나에 대체 사제 몇 명이 같이 온 거지?

무엇인가 가마 타고 입장
뒤따라 입장하는 성직자들
미사 집전하는 사제들

물론 대축일을 맞아 향로도 신나게 날아다녔다. 무게가 53kg라는, 엄청난 크기의 향로가, 그 안에 피운 향의 연기를 내뿜으며 머리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전날은 영문도 모르고 향로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니, 이틀 연속으로 향로의 비행을 본 셈이다. 


미사 끝나고 나오는데 광장에서 어제 저녁때 만난 선생님을 먼저 마주치고 자매도 바로 만나게 되었다. 한국인 한 번 만나기가 어려웠지 그 다음에는 계속 마주친다. 자매가 조언해주기로 Zara라는 스페인 여성복 브랜드가 한국에서 인기 있다고 한다. 아내에게 스페인 옷을 선물하겠다는 기대감에 매장을 찾아보지만, 오늘은 대축일로 휴일이라 문을 다 닫아 실패. (이때 처음 자라를 알게 되어 이후 한국에서 자라 옷 구경 많이 했다 ㅋㅋㅋ)


9. 성당 옆 호텔에서 공짜 식사하기

잡다한 기념품 쇼핑을 좀 더 하다가 대성당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와 보니 다시 한 무리의 한국인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성당 옆에 있는 럭셔리한 호텔에서 선착순 10명의 순례자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한다고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하루 세 번, 오전 9시, 낮 12시, 저녁 7시라니 저녁식사는 먹을 수 있겠다 싶어. 몇몇 순례자들과 경험삼아 해보기로 했다.


한 시간 전인 6시에 아까 약속한 한국인 3명을 만나 총 4명의 한국인 팀이 제일 먼저 줄을 섰고, 독일인 한 명, 이탈리아인 두 명, 프랑스인 하나, 또 독일 이탈리아 하나 씩,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늦게 온 몇 명은 10명이 다 찼다는 말에 돌아섰다. 정보를 들은 대로 호텔 레스토랑 입구 옆, 자동차 출입문에서 기다리니 7시 정각에 관리하는 남자가 와서 식사 쿠폰을 주었다.

호텔 식당에서 배식 중
볶음밥과 빵, 국수

순례자들은 레스토랑 정문이 아니라 뒤편 주방 쪽 출입구로 들어가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다. 아마도 직원용 식당인 듯. 그래도 그게 어디야 공짜인데. 감사히 먹었습니다. 순례자 전용 방이 마련되어 있어 그 안에서 식사를 했다. 스페인식 볶음밥인 해물 빠에야에, 국수가 들어간 수프. 그리고 와인도 한병 줍니다. 근데 자기는 해물을 먹어본 적이 없다며 빠에야에는 손도 안 대는 유럽 친구들이 몇 명 있다. 안 먹는 빠에야 하나 가져다 한국인 네 명이 나눠먹고 보답으로 내 바나나를 그 친구에게 주었다.


10. 산티아고와 작별하기

버스 터미널을 향해 걷다가 뒤돌아 본 산티아고 대성당

식사 후, 이제 아쉽지만 산티아고를 떠날 시간이다. 버스 터미널, 즉 estacion autobuses 까지는 도보로 20분 남짓. 순례길 걷던 실력(?)에 이 정도는 가뿐하지. 가는 길에 마지막 기념품으로 딸아이가 좋아할 모습 떠올리며 타르타 데 산티아고 2개를 7유로에 샀다.

버스 터미널 estacion autobuses

이번 마드리드행 버스는 야간 버스이다. 21:30 산티아고 출발해서 6:30 마드리드 도착할 때까지 9시간을 달린다. 같은 버스를 타는 한국인 순례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님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특히 프랑스 길은 워낙에 기간이 한 달 이상 걸리는 코스라, 만난 한국인들 중 은퇴하신 분들과 대학생을 제외하면 직장인은 대부분 교사였다. 유럽인들은 가깝기도하고, 휴가도 비교적 자유로우니, 더 다양한 사람이 이 길을 걷겠지?



글을 쓰고 생각해보니 11년 전이다. 이 때 만났던 사람들 모두 11살씩 더 먹었겠지. 이들에게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내게는 어떤 의미일까. 브런치에 글을 쓰며 그때를 다시 생각해보는 이 시간 역시 귀하고 소중하다.





* 포르투갈 길 소개 및 전체 일정은 아래 글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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