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주말에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주로 남편과 함께 취향에 맞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즐거운 휴식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워낙 예능 프로그램 보는 것을 좋아해서 요일별로 꼭 챙겨보는 예능이 있을 정도인데요. 특히 요즘 주말에 꼭 잊지 않고 챙겨보는 예능은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첫 시즌이 나왔을 때도 지금은 남편이 된 (구) 남자친구와 열심히 챙겨보던 참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최근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반가웠어요. 게스트가 실제로 사용하는 냉장고를 스튜디오로 가지고 와서 그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셰프님들이 주제에 맞는 요리를 무려 15분 만에 만들어주시는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항상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셰프님들이 만들어주시는 요리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게스트의 취향에 맞추어 제공되기 때문에 매 회차마다 프로그램의 MC들이 게스트에게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혹시 특별히 좋아하는 재료나 음식이 있으신가요?"
평소에는 그냥 흘려듣던 질문이었는데 이번 주에는 왠지 이 질문이 제게로 와닿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재료나 음식이 있던가?'하고 잠깐 생각하니 답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튀어나왔습니다. 바로 계란찜입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계란을 참 좋아했습니다. 삶은 계란, 계란프라이, 계란말이 등등 계란으로 만든 요리라면 모두 다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계란 요리는 언제나 '계란찜'입니다. 계란은 값싸고 구하기 쉬운 재료이면서 영양가도 있고, 무엇보다 요리로 만들었을 때 맛에 있어 실패하기 어려운 재료이기 때문에 제 어린 시절 메인 요리사셨던 외할아버지께서 요리할 때 자주 쓰시던 재료였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시는 계란찜은 제가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요리 top 5 안에 들 정도로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음식이에요. 주말 아침, 아주 살짝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기 위해 주방으로 갔을 때 할아버지가 해두신 계란찜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계란찜이라고 하면 주로 뚝배기에 담긴 폭탄 계란찜을 많이 생각하지만 할아버지의 계란찜은 계란물을 찜기에 찐 탱글탱글한 푸딩 같은 계란찜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계란찜은 그 구성이 매우 간단합니다. 다른 부재료 없이 계란, 물, 소금이 재료의 모든 것이거든요. 그래도 할아버지의 계란찜에는 나름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바로 맛소금으로 간을 한다는 것과 찌기 전에 계란물 위에 깨소금을 살살 뿌리신다는 거예요. 계란찜은 자칫 잘못하면 계란의 비린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간을 적절히 잘 해주는 것이 맛있는 계란찜을 만드는 비법이라면 비법이지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계란의 비린맛도 잡고 감칠맛도 살려주는 맛소금을 이용해 간을 한 후, 조금 더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해 깨소금으로 마무리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냄비에 살짝 물을 채워 채반을 얹은 후, 계란물이 담긴 그릇을 얹고 15분 정도 찌면 맛있는 계란찜이 완성되지요.
갓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란찜은 정말 환상의 맛입니다. 숟가락으로 살짝 떠 호호 불어 입 안에 넣으면, 여전히 뜨거워 혀로 이리저리 굴려야 하긴 하지만, 이내 사르르 녹는 부드러운 계란의 맛이 저를 몹시 행복하게 해 주지요. 하지만 다 식어 차가운 계란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차가워진 계란찜에 밥솥에서 갓퍼낸 뜨끈뜨끈한 밥을 넣어 비벼 먹는 거죠. 그러면 차가운 계란찜과 뜨거운 밥이 만나 먹기 딱 좋은 온도가 된답니다. 여기에 살짝 새콤한 김치까지 곁들이면 그 맛이 아주 별미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계란찜을 어릴 때는 늘 동생들과 나누어 먹어야 했었기 때문에 마음껏 먹고 싶은 만큼 먹었던 기억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른 손바닥만 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한 그릇의 계란찜을 다섯이서 나누어 먹어야 했거든요. 저는 맏이이고, 동생들은 어려서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저보다 더 마땅치 않으니 많이 먹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동생들에게 양보해야 했을 땐 너무 아쉽고, 또 속상할 때도 많았습니다. 저 계란찜을 원 없이 혼자 다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하곤 했었어요. 그만큼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계란찜 한 그릇, 아니 두 그릇도 맘껏 혼자 다 먹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는 어른이 된다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오늘, 온전히 저를 위한 계란찜 한 그릇을 앞에 두니 먹기도 전부터 행복감이 밀려왔습니다. 따끈따끈하고 보들보들한 계란찜 덕분에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역시, 계란찜은 제 소울푸드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