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와 무려 열 살 차이가 나는 막내 사촌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3월이 시작되며 풋풋한 새내기 대학생이 되었지요.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경험들을 해볼 생각에 들떠있는 동생을 보며 10년 전, 동생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던 저의 대학 새내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제 대학시절 거의 모든 순간들을 함께 빼곡히 채워준 친구, Y도 함께요.
일단 친해지면 저런 괴짜가 또 어디 있나 싶게 웃긴 매력의 소유자이지만, 사실 Y는 무척 내성적인 면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어려워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대학교에 입학해 처음에는 친구도 없이 혼자서 다니다가 어느 날 Y는 마음을 먹고 정말 용기 내어 제게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예상치 못한 동기의 갑작스러운 인사에 저는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그녀의 떨리는 인사를 아주 반갑게 받았지요.
'그녀가 나에게 인사를 해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녀의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Y와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 뒤로는 아주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대학시절 = Y'라는 공식이 생길 정도로 늘 함께 붙어 다니곤 했습니다. 나중에서야 Y에게 들은말로는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먼저 말을 못 걸고 있다가는 정말 4년 내내 혼자 학교를 다녀야 할 것만 같았다고 해요. 그래서 먼저 인사하면 그 인사를 잘 받아줄 것 같은 사람을 골라 용기를 내었는데 그게 저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이미 몹시 친할 때라 장난으로 내가 쉬워 보였냐며 새침하게 농담을 건넸지만 사실은 고마웠습니다. 그날 제가 선택을 받은 덕분에 저는 Y라는 좋은 친구가 생겼으니까요.
Y와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즐거웠던 기억들이 참 많습니다. 공강 때 캠퍼스 안에 있는 산책로를 걷다가 서로에게 낙엽을 꽂으며 난데없는 인디언 놀이를 하기도 하고, 과제를 한다는 핑계로 경주에 놀러 가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엉덩이가 아파서 며칠 동안 고생한 적도 있었어요. 시험기간이면 24시간 개방하는 자습실에 자리를 잡고 각자 공부를 하다가 밤 12시가 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편의점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러고는 단과대 테라스에서 팟타이 맛 컵라면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지요. 그러다가 밤이 늦어 결국 공부는 뒷전으로 둔 채 짐을 챙겨 집으로 갔던 추억은 여전히 Y와의 단골 추억여행 에피소드입니다.
Y와 저는 둘 다 자취를 했다 보니 종종 함께 장을 봐서 밥을 해먹기도 했습니다. Y는 요리에 흥미도, 재주도 없어서 음식을 만드는 건 늘 제 몫이었지만요. 두 대학생의 지갑사정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주로 재료가 저렴한 음식들을 해 먹었던 것 같아요. 그중 Y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 바로 비빔국수와 대패삼겹살입니다. 새콤달콤한 고추장 베이스의 양념장을 만들고 채소는 그때그때 저렴한 것이나 집에 있는 것들로 채를 썰어 둡니다. 그리고 풍부한 맛을 위해 꼭 빠뜨리지 않았던 고명은 바로 볶음김치예요. 매콤한 양념과 더불어 삼겹살의 느끼함도 잡아주고, 무엇보다 김치와 돼지고기는 언제나 잘 어울리는 최고의 조합이니까요. 소면을 잘 삶아 미리 만들어 놓은 양념장, 채소와 함께 버무려준 후 볶음김치 고명을 올리면 맛있는 비빔국수는 완료. 마지막으로 매콤 달콤한 비빔국수에 노릇노릇 잘 구운 대패삼겹살까지 곁들이면 소박하지만 남부럽지 않은 자취생들의 한상차림이 완성됩니다. 열심히 밥상을 차린 보람이 있게 Y는 항상 최고의 리액션을 보여주며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었습니다. Y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저도 덩달아 맛있게 국수 한 그릇을 뚝딱하곤 했지요.
그렇게 즐거웠던 대학 시절은 가고 졸업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십 대 중반 청년들이 다들 그러하듯 각자 먹고살길을 찾아 저도, Y도 바쁜 시간들을 보냈어요. Y는 졸업 후 자취를 마치고 본가가 있는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에 마음의 여유도 없는 데다 사는 곳도 멀어지니 자연스럽게 만남의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종종 메신저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지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뜬금없이 Y에게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글이 아니라 사진 한 장이 달랑 와있었어요. 워낙 웃긴 사진을 모으는 걸 좋아하는 친구라 새로 찾은 사진이 혼자보기 아까워 보낸 건가 하고 별생각 없이 문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자 속 사진에는 Y가 자신의 다이어리에 기록한 작은 그림과 글이 담겨있었어요.
내가 만든 비빔국수가 제일 맛있다는 말, 그 한 줄에 찌르르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알고 보니 다이어리에 음식별로 가장 그 음식을 맛있게 해주는 사람을 짝지어 기록하고 있었다는데 제가 비빔국수 부문에서 1등을 한 것이었어요. 음식 해서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 음식을 주변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만든 음식이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친구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기억된다니! Y는 그냥 재미 삼아 보낸 사진일지 몰라도 제게는 그 사진 한 장이 너무나 큰 기쁨과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는 '내일 봐.'하고 헤어지고 다음 날 눈뜨면 학교에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제는 미리부터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 하루, 고작 몇 시간 정도 Y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Y도 저도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거겠지요. 어른들의 친구 만나기란 으레 그런 것이니까요. 이제 서른이 되어 더 이상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가 되었음에도 Y만 만나면 어김없이 다시 스무 살, 철없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시답잖은 농담과 알맹이 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우스갯소리로 '우리 철들지 말자'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도, 흰머리 할머니가 되어도, Y를 만날 때만큼은 늘 스무 살의 철부지이고 싶어요. 조만간 시간을 내어 Y와 비빔국수 한 그릇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물론, 제가 만든 1등 비빔국수이면 더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