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이라는 단어는 떠올리기만 해도 단숨에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마법의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며 어른이 되고, 혼자의 힘으로 거친 세상을 헤치며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을수록 더욱 진하게 그리워지는 집밥. 여러분에게 집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제가 집밥을 떠올렸을 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생각나는 음식은 바로 외할아버지의 ‘양념 꼬막’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어 독립을 할 때까지 줄곧 외갓집에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해주시는 밥을 먹으며 자랐어요. 보통 이런 경우에는 추억의 음식으로 할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많이들 떠올릴 텐데 할아버지의 음식이라니 조금 신기하지요? 사실 저희 할머니께서는 요리에 흥미가 별로 없으셨어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리 솜씨도 훌륭한 편은 아니셨답니다. 그에 반해 할아버지의 입맛은 안타깝게도 성격만큼이나 꽤 까다로우셨고 늘 할머니 음식에 불평을 하셨답니다. 결국 할아버지께서는 은퇴를 하실 무렵부터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손녀인 저는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해주시는 음식을 더 많이 먹으며 자랐답니다.
매년 추운 겨울이 되면 할아버지께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수산시장으로 가 꼬막을 한 망 사 오시곤 하셨습니다. 뻘이 잔뜩 묻은 꼬막을 박박 문질러 여러 번 씻어낸 다음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여 꼬막을 삶으셨지요. 주방에 서서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조금만 기다리면 저녁때 맛있는 반찬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어린 제 마음은 갓 삶아진 꼬막이 뿜어내는 수증기처럼 들떴습니다.
꼬막은 일반적인 조개들과 달리 모두 입을 열 때까지 오래 삶으면 살이 쪼그라들어 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끓는 물에 넣고 한 방향으로 젓다가 네다섯 개 정도가 입을 벌리기 시작하면 불을 끄고 건져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숟가락을 이용해 한 김 식은 꼬막의 껍데기를 비틀어 열면 속에 탱글탱글한 꼬막살이 수줍게 얼굴을 내비치지요. 살이 붙어있지 않은 쪽의 껍데기는 버리고 살이 붙어있는 쪽의 껍데기는 꼬막살이 위로 향하도록 가지런히 반찬통에 쌓아줍니다.
일반적인 양념 꼬막은 꼬막살 위에 되직하고 빨간 양념장을 조금씩 올려 반찬으로 먹지만 저희 할아버지 표 양념 꼬막은 스타일이 조금 다릅니다. 켜켜이 쌓은 꼬막 위에 파, 마늘이 들어간 간장 양념장을 한 번에 부어버리는 방식이에요. 마치 계란장을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양념 꼬막보다는 꼬막장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아마도 일일이 꼬막 껍데기를 까는 데 모든 인내심을 써버린 성격 급한 경상도 사나이가 택한 최선의 요리 방법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급한 성격이 더 맛있는 꼬막 요리를 탄생시켜버렸어요. 간장 양념이 꼬막 살에 쏙 배어들어 짭조름하니 아주 밥도둑이 따로 없거든요. 흰쌀밥을 한 숟갈 퍼서 그 위에 양념이 잘 밴 꼬막 살을 하나 얹어 먹으면 너무 행복해서 몸이 절로 배배 꼬입니다.
짭조름한 겨울의 맛은 대학교에 진학한 후 자취를 시작했을 때도 늘 생각나곤 했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올 때쯤 오랜만에 외갓집에 가기 전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면 경상도 특유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뭐 먹고 싶은 건 없나?” 하고 물으셨어요. 그때마다 제 대답은 한결같이 “꼬막! 꼬막 먹고 싶어.”였습니다. 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치, 알았다.” 하시며 할아버지께서는 먼저 전화를 뚝 끊으셨지요. 언제나처럼 용건만 간단히 주의인 전화를 뒤로하고 외갓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면 둥그런 스테인리스 반찬통 속에 간장 양념을 머금은 동글동글한 꼬막들이 소복이 담겨있었어요. 다른 가족들 중에는 저만큼 꼬막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외갓집에서 머무는 주말 동안 그 양념 꼬막은 거의 오롯이 제 차지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 자취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 꼬막들을 맛있게 다 먹는 것이 제 숙제이기도 했어요. 제가 가고 나면 남은 꼬막을 먹을 사람이 없었거든요. ‘양념 꼬막 다 먹기’ 숙제는 제가 살면서 해온 숙제들 중 가장 맛있고 행복하게 했던 숙제였습니다.
그저 맛있게 먹을 줄만 알았던 양념 꼬막에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사랑이 담겨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훨씬 더 지나 스스로 양념 꼬막을 만들어보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직접 양념 꼬막을 만들어보니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껍데기에 묻은 불순물이 많아 찬물에 몇 번이고 씻어내야 하고 소금물에 해감도 해야 합니다. 어찌어찌 삶아 하나하나 껍질을 까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습니다. 추운 날, 시장에 다녀와 투박한 손으로 꼬막 껍데기를 하나하나 까셨을 할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 한구석이 찌릿했습니다. 사실은 꼬막이 아니라 사랑을 반찬으로 먹었구나 하고요. 경상도 할아버지답게 성격도 불같고. 말로 손녀 속을 뒤집어 놓는 데는 아주 일가견이 있는 할아버지지만 삶의 여러 장면 속 숨겨진 할아버지의 깊은 속정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한데 버무려져 마음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해집니다. 집밥하면 양념 꼬막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유는 꼬막 한 알 한 알마다 투박한 할아버지만의 사랑법이 스며든 탓이겠지요. 매 겨울, 그 사랑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