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진 겨울, 꽁꽁 싸매고 외출해도 한껏 몸이 움츠러드는 한파가 찾아왔습니다. 뉴스를 틀면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요즘이에요.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이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제가 살고 있는 남부지방은 한겨울에도 좀처럼 눈을 구경하기 힘든 곳입니다. 눈 예보가 있어도 눈 대신 비가 내리는 일이 허다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눈이 내릴 거라는 소식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어요. 하지만 전국을 강타한 매서운 한파에 남부지방의 온난한 기후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걸까요?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도 아주 오랜만에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모두 하얗게 느껴질 정도로 제법 많이 내렸어요. 사뿐사뿐 내려앉는 함박눈을 감상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밤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9살, 동생이 6살이던 때의 어느 겨울날이었어요. 외갓집과 걸어서 1분 남짓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부모님이 살던 집이 있었어요. 저희 자매는 주로 외갓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지만 그날은 부모님이 사는 집에서 단둘이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엄마는 항상 바빴고 거의 매일 집에 늦게 들어오셨어요. 어느새 까만 밤이 되고 동생과 TV 앞에 앉아 언제쯤 올지 모르는 엄마를 기다리다가 문득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저녁밥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엄마한테 맛있는 거 해줄까?”
씨익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의 손을 이끌고 주방으로 향했습니다. 내복바람으로 냉장고 옆에 비장하게 선 두 어린이는 엄마에게 어떤 음식을 해 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일단 불을 쓰는 요리는 선택지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아직 너무 어린 나이라 어른 없이 가스레인지를 사용하면 아주 많이 혼났거든요. 일단 무슨 재료가 있는지부터 살펴보았습니다. 전기밥솥 속에 밥이 있었고, 작은 캔참치 몇 개, 그리고 조미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좋아, 이걸로 참치 주먹밥을 만들자!”
캔참치와 조미김은 9살, 6살 꼬마들에게는 최고의 재료였어요. 저는 곧바로 큰 그릇을 가져와 밥솥에서 밥을 잔뜩 퍼 담았습니다. 그리고 캔참치를 조심조심 열어서 밥 위에 부었어요.
“자, 이제 숟가락 가지고 와서 섞자.”
동생과 저는 숟가락을 하나씩 쥐고 참치와 밥을 열심히 비벼서 섞었습니다. 그리고는 각자 한 숟가락씩 맛을 봤어요. 짭짤한 참치와 참치 기름에 비벼져 윤기가 흐르는 흰밥이 입에 들어가자 사르르 녹는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냥 캔참치를 넣고 비빈 밥일 뿐인데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맛있었던 걸까요? 얼추 밥이 완성된 것 같다고 생각한 어린이들은 작은 손으로 주먹밥을 조물조물 빚기 시작했습니다. 한껏 집중해서 동그라미, 세모 모양으로 빚은 밥을 하나씩 접시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하나 둘 주먹밥을 빚다가 갑자기 저와 동생의 눈이 마주쳤어요. 그러고는 약속했다는 듯이 둘 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각자가 빚고 있던 주먹밥을 한입 가득 와앙 베어 물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어요.
“우리가 주먹밥 먼저 먹은거는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알겠지?”
그 이후로도 주먹밥은 한창 빚어지던 중에 자주 뱃속으로 야금야금 사라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두 어린이는 최고의 자제력을 발휘해 엄마 몫의 주먹밥 네다섯 개를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어요. 자, 이제 주먹밥은 완성되었고 대망의 하이라이트인 조미김을 뜯었습니다. 만화에서 본 주먹밥처럼 아래에 김을 둘러 완벽한 주먹밥을 만들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조미김은 바삭바삭해서 주먹밥 아래에 예쁘게 붙이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찌어찌 붙이다 보니 조금 찢어지고 엉성하긴 해도 제법 주먹밥 같은 비주얼이 완성되었어요. 완성된 주먹밥을 정성스레 접시에 담았습니다. 주먹밥을 담고 보니 날씨가 추워서 엄마가 오기 전에 주먹밥이 다 식어버릴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쿠킹포일이 보여 포일로 접시를 덮어두었습니다.
엄마를 위한 주먹밥이 무사히 완성되었다고 동생과 뿌듯해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집 전체가 정전이 되면서 집안이 깜깜해졌습니다. 저와 동생은 갑작스러운 정전에 몹시 놀랐어요. 정전에 대처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일단 깜깜한 집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듬더듬 벽을 짚어 어찌어찌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고 현관문을 활짝 열었어요.
“우와...! 눈이다!”
바깥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주황빛 가로등 아래 소복이 쌓인 하얀 눈 위로 저와 동생은 강아지처럼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그 추운데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눈을 만지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습니다. 한참 놀다가 둘 다 코가 빨개져서 집 앞에 털썩 앉아 숨을 고르고 있으니 골목 사이로 빨간 아토스 한 대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드디어 엄마가 온 것입니다.
“엄마다~!”
엄마가 천천히 주차를 하는 동안 저와 동생은 차 주변을 폴짝폴짝 정신없이 뛰어다녔습니다. 얼른 엄마에게 저와 동생이 만든 주먹밥을 주고 싶었어요. 주먹밥을 먹은 엄마의 반응이 어떨지 너무나도 궁금했습니다. 정전이 된 집을 본 엄마는 능숙하게 누전차단 스위치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집은 다시 환해졌지요. 저와 동생은 앞다투어 엄마에게 주먹밥을 들이밀었습니다.
“엄마, 이거 우리가 만들었어! 참치랑 밥이랑 김이랑 어쩌고 저쩌고......”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엄마는 외투도 벗지 못한 채 주먹밥을 입에 넣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맛있다고 해주었어요. 추운 날씨 탓에 결국은 차갑게 식어버린 참치 주먹밥을 엄마는 끝까지 맛있게 다 먹어주었습니다.
제법 마음이 포근해지는 이야기지만 사실 지금의 엄마와 제 사이는 이 추억만큼 따뜻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잘 못 챙겨줘서 미안하고, 그럼에도 잘 커주어 고맙다고 말해주던 엄마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고, 많은 상처가 쌓였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에 대한 마음의 문을 결국 닫아버렸습니다. 이 참치 주먹밥 이야기는 몇 개 되지 않는 엄마와의 좋은 추억들 중 하나입니다. 엄마와의 추억은 너무 적어서 꼽는데 한 손도 채 다 쓰지 못한다 것이 가끔은 슬프게 다가옵니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얼굴도 못 보고 다정한 말 한마디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항상 엄마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 믿으며 엄마를 그리워하고, 이해하고, 몹시 사랑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참치 주먹밥을 다시 만들어 보았어요. 마음은 조금 아리지만 그래도 좋은 추억이 있다는 것으로 되었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