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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모락모락 컵라면_비 오는 날의 낭만

by 뚜우 Mar 17. 2025

  이번 주말에는 봄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저는 비 오는 날을 무척 좋아해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이면 빗물로부터 양말을 보호해 줄 튼튼한 운동화를 신고 가장 좋아하는 우산을 챙겨 괜히 밖으로 나서보곤 합니다. 우산에 빗방울이 토독토독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동네나 가까운 공원을 한 바퀴 휘- 돌곤 하지요. 빗속을 가만히 걷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도 빗물에 씻겨 다시 깨끗하고 말끔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저는 어릴 때부터 유독 비가 오는 날을 몹시 좋아했습니다. 비가 세차게 오던 날 아끼는 캐릭터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가 거센 바람에 우산이 부서져 부모님께 혼나기도 하고, 그 유명한 태풍 '매미'가 왔을 때도 호기심에 밖으로 슬리퍼를 신고 나갔더랬습니다. 살던 동네 입구에 빗물이 소용돌이치며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가까이 가서 유심히 보다가 호기심이 발동해 하수구에 한쪽 발을 쓱 대보았는데 신고 있던 슬리퍼 한 짝이 그만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지 뭐예요. 그렇게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려 반쪽 맨발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간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비만 오면 신나서 우산을 들고나가기 바쁜 아이었던 제게, 어느 날, 원래도 좋아하는 비 오는 날을 한 층 더 기다리게 만드는 특별한 장소가 생겼습니다. 그 장소는 바로 외갓집 옥상에 새로 생긴 작은 비닐하우스였어요. 이 비닐하우스는 사실 외할아버지께서 고추를 비롯한 각종 채소들을 널어 말리기 위해서 손수 만드신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비를 좋아하는 꼬마의 아지트도 겸하게 되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아담한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비닐 천장에 비가 토독토독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비 오는 풍경을 감상하곤 했습니다. 가만히 빗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나른해져 꿈벅꿈벅 졸기도 했어요. 한동안 비구경을 하다 보면 몸이 슬쩍 으슬으슬해집니다. 조금 쌀쌀하다 느껴지면 어김없이 따뜻한 국물이 가장 먼저 생각나기 마련이지요. 어린 초등학생도 본능적으로 '추울 땐 따뜻한 국물'이라는 공식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어 졌거든요.


  '아, 여기서 비구경하면서 라면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그때도 지금도 추진력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저이기에 바로 동네 슈퍼에 컵라면을 사러 달려갔습니다. 가지고 있던 용돈을 털어 자그마한 컵라면 하나를 사서 얼른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을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컵라면을 들고 헹여나 떨어뜨릴까 조심조심 옥상 비닐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럴 때는 고작 3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겨우 다 익은 컵라면의 뚜껑을 조심히 여니 맛있는 라면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피어 나왔습니다. 토독토독 빗소리에 후룩후룩 라면 먹는 소리가 더해지니 이렇게 듣기 좋은 음악이 또 어디 있을까요?



   비구경을 하며 따끈한 라면을 먹고 있으니 꼭 비소풍을 나온 것 같아 몹시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먹는 컵라면 한 사발은 비 오는 날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저만의 낭만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비 오는 날을 더욱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지금은 외갓집 식구들이 모두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의 아지트였던 옥상 비닐하우스는 이제 추억 속에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저도 꿈의 집을 지어 사는 날이 온다면 꼭 마당 한켠에 비구경을 위한 저만의 아지트를 만드리라 늘 다짐하곤 한답니다. 언젠가는 꼭 오고 말 그날을 상상하며, 이번 주말에는 베란다 문을 열어두고 빗소리를 들으며 컵라면에 물을 부었습니다.

  베란다로 들어오는 촉촉한 비냄새와 맛있는 라면 냄새가 섞여 단숨에 어린 시절의 그 낭만 속으로 저를 데려갔어요. 봄비 덕분에 작은 컵라면 하나로 이번 주말은 제법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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