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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단단 Jan 01. 2024

이불부터 갰다.

2024 첫 산책


2023년을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보냈다. 차팅 중이었고, 나에게 부과된 일과를 정리해놓고, 유튜브로 새해 카운트다운 영상을 봤다. 카운트다운 영상과 실제 시간은 몇 초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새해 폭죽이 터지는 모습을 보며 2024년을 자축했다.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을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또 습관처럼 유튜브를 보는데, 갑자기 읽고 싶은 책이 생겨서 이불을 개고 나올 수 있었다. 집이라는 게, 침대라는 게 참 아늑하고 편한 이미지지만 무섭기도 한 게 어찌나 흡수성이 좋은지 매번 이곳에 누워있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천천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침대 안에서 나는 자주 무기력해지고 타성에 젖기 쉬운 편이다. 그런 내가 이불에서 쉽게 나올 수 있는 날은 햇빛이 아주 밝게 뜬 정오 무렵이거나, 아니면 그런 날씨가 아님에도 해결해야만 하는 할 일이 있거나,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기 지루할 때.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보고 종이를 부스럭거리고 싶거나 이력서를 써보고 싶을 때(이력서를 써보면 그동안 내가 어느 정도의 길을 걸었는지 눈으로 확 보이니까 좋다. 다만 자주 하면 ……)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느낄 때다.


  나는 그럴 때면 걷고 싶어 진다. 그런데 오늘은 드물게 이런 이유들이 거의 해당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가기 위해 일어나서 이불부터 갰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이불을 걷어내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생도 어쨌든 이불을 걷어내고 잠시 적응 안 되는 추위에 몸을 떨다가 어쩔 수 없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 것의 반복이려나. 샤워기 앞에서 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온몸을 구석구석 씻어내는 그런 것이려나.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해가 없는 날이면 세상 무기력해지는 나란 인간이 해가 자취를 감춘 한 늦저녁에 겨울바람을 쐬러 바깥으로 나온 날이라 신기할 뿐이다. 그리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고르고 오랜만에 소설을 투고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고 밤에 잠을 잘 자기 위해 커피가 아닌 따뜻한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책을 읽다가 집으로 되돌아오는 삶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카뮈의 이방인은 집에 새 책이 있지만 헤질대로 해져버린 책의 두툼한 낱장들에게 정을 느끼기도 했다. 겨우 샤워를 하고 조금 가벼워진 기분으로 머리를 말리는 동안 눈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책을 펼쳤다.



어라, 첫 챕터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이라니. 집에 명상록도 사놓고 다 읽지 못했는데, 그래도 이름은 들어봤다고 조금 더 수월하게 읽힌다. 이 대단했던 로마의 군주도 한때 뭉그적(?) 거릴 때가 있었구나. 하긴, 침대는 만인의 보금자리니까. 그때는 하루 걸러 하루 전쟁(?)이었고, 지금보다 훨씬 더 정치나 외교적인 부분에서 불안정한 시기였으니까. 더 공포스럽고 불안했겠지. 그래도 그는 나서야 했을 것이다. 군주였으니까.



새벽에 침대에서 나오기 힘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해야만 한다.'


스토아학파나 황제, 심지어 로마인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새해 아침, 이불을 반듯하게 개고 샤워를 했다. 그의 말처럼 내가 뭐 한 나라의 군주이거나, 그에 준하는 엄청 중요한 사람으로서가 아닌, 그저 한 인간으로서 침대 밖을 나선다. 이렇게 아침에 우연히 마주한 책의 내용은 다시 한번 나를 북돋아준다. 포춘쿠키를 보던 그 시절처럼, 알 수 없는 희망이 생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그런 영웅심리까지는 못 되고, 다만 나가서 산책을 해보자는 그런 다짐을 하게 된다.


오랜 무기력 끝에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섰다. 패딩을 단단히 껴입고, 단단하게 지면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일이었다. 이불부터 갤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쉬는 날에는 꼭 완벽하게 갖춰입고 나서는 걸 포기하고 간결하고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오는 것을 연습해야겠다. 삶이 조금더 가벼워지겠지.


 오늘은 에너지가 넘치는 날이다. 새해 첫걸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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