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 온 지 벌써 5일째다. 어딜 가더라도 처음 일주일은 늘 부적응의 시기다. 아무것도 없는 기숙사 주변이 그런 나의 부적응에 기름을 부었다. 나는 또 오지에 떨어졌다. 이거 해남 데자뷰인가. 리조트 알바 담당자한테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여길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황량한 주변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정녕 면허도 차도 없이 이런 곳에서 3개월을 지낼 수 있단 말인가. 막막했다. 중도 이직이든 퇴사든 하고 싶어졌다. 무사히 계약 기간 만료할 수 있으려나. 아직 일주일도 안 됐는데 약한 소리가 하고싶다. 저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아요. 계약 파기하겠습니다.
버스 배차가 해남처럼, 아니 해남보다 더 극악이었다. 노선은 아침 저녁 나눠서 딱 두 갠데 한 시간에 한 두대 정도였다. 더군다나 버스가 시간 맞춰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해남은 길이 안 막히는 마을 버스여서 시간 하나는 칼같이 지켜줬는데. 버스가 하도 오질 않아서 놓친 건지 아직 안 온 건지 불안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슈퍼엔 찾는 물건이 없었고, 사고 싶은 게 있는 마트는 배송 주문하려면 신용카드로만 결제가 가능했다. 결국 아무거나 먹지 못하는 뚜벅이는 완벽하게 자급할 수 없는 이상 도시에 짱박혀 있는 게 제일이었던 거다.
하는 일이라도 좀 하고 싶었던 일이면 좋으련만, 아무리 그렇게 살고싶다던 오키나와에 왔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긴장 상태로 눈치보며 일 하려니 현타가 왔다. 내가 진짜 이러려고 왔나, 하는 생각이 절로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여기 온 건 아닐텐데. 호텔 매점에서 물건 파는 일은 굳이 일본 오키나와가 아니어도 할 수 있을 터였다.
사기 위해 벌고, 벌기 위해 사지 않아도 괜찮은 진짜 인생을 배우고 싶어서 떠나기로 마음 먹은 건데 지금 내가 딱 그러고 있었다. 일하다 굶어 죽을 순 없으니 벌어서 먹을 것을 사야 했고, 먹을 것을 사야 하니 벌어야 했다. 목적성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여기 왜 왔더라. 세금도 20퍼센트나 떼여가면서 왜 한국 최저시급 만큼도 못 받으면서 일하고 있지?
어디서 사느냐보다 무엇을 하느냐
돌아가고 싶었다. 도망쳐 나오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집이라는 장소가 그리웠다. 앞으로 1년 동안 내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 없이 여기저기 전전하며 돌아다닐 걸 생각하니 막막했다. 여행자로 살고 싶다, 생태 유목민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내 적성에 안 맞았던 모양이다.
정착할 곳이 필요했다. 아늑하게 몸 뉘일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곳이 절실했다. 내가 원하는 건 심신의 이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앞으로 1년을 유랑할 필요 없다, 이번만 버티면 돌아갈 장소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하는 일에 보람이 없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조금 힘들어도 내가 사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보람 있는 일이라면,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더 나았을텐데. 매장 안에서 계속 매대 주변을 서성이거나 재고 채우고 계산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외국어라 상사의 말을 더 긴장하며 들어야 했고, 제대로 얘기하고 있는 게 맞는지도 긴가민가했다. 조금 여유있게 농담 따먹기도 하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떠들고 나면 기분도 후련해지는데 일본이어서인지, 호텔 매점이어서인지. 영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대신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너도나도 즐겁게 할 수 있으면서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일. 난 역시 레저나 운동 쪽 일을 하고 싶다.
사는 장소가 달라져도 사는 모양새가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번 해남에 있었을 때는 어떤 환경이 나한테 잘 맞는지를 알게 됐다면, 이번 오키나와에 와서는 어떤 일이 나한테 잘 맞는지를 알게 됐다. 확실히 산골짜기보다 바다가 보이고 평야에 있으니 마음은 놓였지만, 그게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았다.
돌고 돌아 결국 제주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원래라면 1년을 여기서 보내야했지만 중간중간 우핑을 하러 다니는 것도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불가능했다. 전입 전출 신고 간격이 15일을 넘기면 안된다나 뭐라나.리조트 바이트 파견 회사를 거치고 싶지 않아 새 일자리와 집을 개인적으로 구하자니 1년 미만 계약은 상대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급여는 코딱지만한데 월세로 나가는 돈은 한국과 비슷했다. 어차피 일해서 돈벌고 월세 낼 거라면 차라리 한국 사정이 더 나았다. 게다가 워커웨이나 헬프엑스라면 모를까, 우프는 관광비자로도 가능하다. 차라리 관광비자로 3개월 우핑만 다니는 게 나을듯하다.
계약이 끝나면 오키나와 남부 난죠시에서 일주일 우핑을 하고 한국에 빨리 귀국하는 일정으로 마음을 바꿨다. 다행히 우핑할 장소가 정해지긴 했다.
사실 일본 워홀을 마치면 한국에서 면허나 이런저런 수영 자격증을 따고, 수영 관련 일을 하며 자금을 더 모아 호주에도 가볼 생각이었다. 호주는 더구나 워홀 비자를 3년까지도 연장할 수 있으니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오지에 떨어져 사기당한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다. 그보다도 어느 나라에 있는지보다 어떤 일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살던 곳을 버리고 한국을 떠난다고 해서 갑자기 사람답게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생태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던 대로 살 거라면 차라리 살던 곳에 사는 게 백번 낫다.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면 "필요한 건 전부 내 집 마당에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고누가 그랬던가. 한국에서 정착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해양 레저 일부터 시작해서 땅을 얻으면 협동 조합체를 꾸려 마을 공동 텃밭을 중심으로 종합 건강테라피를 구성해보고 싶다. 자연 속에서 놀고, 운동하고, 자연이 주는 것들을 실컷 먹고, 흙을 만지며 마음까지 정화할 수 있는 진정한 힐링 마을을 만들고 싶어졌다. 이 곳에선 누구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마주치는 생명들의 기쁨이 나의 보람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비슷하게 마을 단위로 연대해 운영하는 제주 구좌읍의 해녀 마을이 있다. 올해 새로 추가된 우프코리아 호스트다. 이 곳에서 우핑을 하며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경험해 보려 한다. 결국 돌고 돌아 제주라면 차라리 올 해 해녀 학교를 포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생각해보니 바보천치가 따로 없다. 하지만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있으리라. 실제로 이 호스트 마을에서는 물질 기술도 배울 수 있었다. 가서 확실하게 배워둬야지. 다음 해녀 학교 지원 전에 제주에 먼저 정착할 준비를 해야겠다. 나를 증명하며 살고 싶진 않지만, 좋아한다는 말 이상으로 보여줄 방도가 없으니 자격증도 따고 말이다.
정작 길을 찾아 방황하며 떠난 곳이 아니라 자꾸 다른 곳에서 다음 길이 보인다. 이걸 변덕이라 불러야 할지, 내면의 인도자라 불러야 할지.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나으니 감사하다.
워커웨이/ 헬프엑스: 전세계 노동-숙식 교환 프로그램. 우프와 비슷하지만 농가에 한정되지 않고 학교, NPO, 일반 가정, 호스텔 등 다양한 장소에서 머무를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농가도 관행농가가 포함되어 있다.
워커웨이 사이트:https://www.workaway.info/
멤버십 비용: 1년에 4만5천원 정도
전세계 약 5만개 호스트 존재
다만 비갱신, 호스트 무료등록이라는 점에서 허위매물이나 악덕 업주를 만날 가능성도 있다.
간혹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곳도 있다.
헬프엑스 사이트:https://www.helpx.net/
멤버십 비용: 2년에 3만원 정도
전세계 약 1만1700개 호스트 존재
멤버십 비용이 저렴하다는 메리트가 있다.
우프: https://wwoof.net/
멤버십 비용: 각 국별 1년에 약 5만원 정도
전세계 약 1만 2천개 호스트 존재
국가별로 멤버십과 사이트가 따로 운영된다. 하나의 멤버십으로 전세계를 갈 수 있는 상기 두 사이트와 달리, 전부 따로 가입해야 하며 가고자 하는 국가가 여러 군데라면 국가별로 모든 멤버십을 지불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비용적인 메리트는 가장 적지만 생태 농업(최소 유기농)을 하는 농가 한정으로 등록되며 가장 미래 지향적이고 대안적인 삶을 느껴볼 수 있는 선진적인 시도라고 생각한다. 5만원이면 현지 여행 하루 숙박비 정도에 불과하므로 투자할 가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