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이셨던 친정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퇴역하셨고 아직까지 관련된 일을 하신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학교 갈 때 '안녕히 다녀오겠습니다'보다 바쁘게 출근하는 엄마에게 '안녕히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를 더 많이 했다. 끝나고 집에 오면 '왔니~'하며 반겨주는 엄마에게 안기는 게 아니라 밤늦게 퇴근한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는 게 일상이었다. 외롭기는 해도 일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멋있었고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며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했었다.
막상 아이를 낳고 마주한 현실은 생각과는 아주 달랐다. 일을 시작하려니 당장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는 거다. 양가 부모님은 지방에 계셔서 마음 편하게 아이를 맡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직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에는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방법을 찾자면 찾을 수 있었겠지만 어느 순간 '이렇게까지 꼭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회의감이 드는 것이다. 일을 해서 월급을 고스란히 아이를 봐주실 분께 드려야 한다면, 이게 몇 년씩 반복되면 내가 이렇게까지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은 거다. 이렇게 2년, 3년 고생해서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거나 높은 사회적 위치에 오를 수 있다면 몇 년 고생한다 생각하고 어찌 됐든 다녔을 텐데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배부른 소리라는 것을 안다. 복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들이라면 이런 고민조차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자아실현보다 조금이라도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사람에게도.
무리를 해서라도 복직을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일을 그만두는 게 맞는 건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결혼 전이었다면 오로지 내 입장만 생각하고 결정했을 텐데, '엄마'가 되면서 무엇을 선택할 때 '나'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였다. 빠듯하긴 했지만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이 가능했었고, 남편은 안정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과 가정을 저울질했고 양육과 살림 쪽에 살짝, 아주 살짝 더 무게가 실렸다. 고민 끝에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직장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근무지는 집. 직급은 엄마 혹은 주부. 업무는 아기 돌보기와 집안 살림의 모든 것. 경력직이 아닌 생초짜 신입인데 인수인계해 줄 사람은 없다. 출퇴근 시간은 자유롭지만 일이 많기도 하고 제대로 잘 못해서 야근에 특근은 기본. 내 상사(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날 부른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쉽게 사표를 낼 수도 없다.
'결혼하면 살림만 주야장천 할 텐데 지금부터 할게 뭐 있냐, 너는 학생이니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게 너의 본분이다'라 말했던 친정엄마는 신혼집에 오면 사위 보고 미안하다 하신다. 반품은 안되지만 AS는 잘해주겠다고 하시며 과거의 발언에 대해 후회하셨다. '결혼하고 살림을 하려면 잘 알아야 할 텐데 내가 그걸 알려주지 못해 후회된다. 일을 하며 사람을 쓰더라도 네가 뭘 알아야 제대로 부탁드릴 수 있을 텐데'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살림을 시작했다. 처음 몇 년은 아이 키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허둥지둥. 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냉장고에 들어간 음식은 뱃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 일쑤. 서랍은 정신없는 내 머릿속처럼 뒤죽박죽. 이게 필요한 건지 필요 없는 건지도 모른 채 그냥 쌓아둔 물건으로 방은 엉망진창. 두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나서부터 그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겨 그때부터 집을 제대로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지 못하지만 이왕 하는 거 잘 해내고 싶어서 아등바등 애면글면한 내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의지가 약한 걸 알기 때문에 기록해야 한다는 핑계로라도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해야 하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친정에서 직접 집안일을 해본 경험이 없고 자취를 해본 적도 없어서 그야말로 살림에 관해서는 백지상태였는데 책으로, 영상으로 선배 주부들의 살림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고 하나둘씩 실천해가면서 '나의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다.
주부 8년 차인 지금도 애씀은 진행 중이다. 주방 서랍에 있던 물건들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았고, 계절마다 옷 정리를 하는 것도 힘들다기보다 빨리 해내자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럼에도 아직 부족한 것들이 많다. 설거지를 미뤄서 싱크볼에 그릇들이 산더미처럼 쌓일 때도 있고, 갑자기 먼지 쌓인 곳을 마주하기도 한다. 남편은 서랍 속을 정리하기 전에 눈에 보이는 것들부터 깔끔하게 해 놨으면 좋겠다며 불만이 많다. 약간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보는 눈이 다른 걸 어쩌겠나. 남편이 원하는 대로 티 나는 집안일도 잘 해내기 위해 애쓰는 수밖에. 살림에 애쓰지 않아도 척척 해내는 그날을 위해 오늘도 살림에 애쓰고 있다.
아무것도 모를 채 시작했던 살림과 육아. 방황을 거듭하다가 이제는 살림을 '업'으로 삼아 제대로 해보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앞으로 살림 초보가 살림 걸음마를 시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애쓰는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