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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Aug 05. 2022

The Name - 록음






살면서 고마운 사람이 많다는 건 정말 복 받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소개할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어찌 담을까 참 많이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더 미뤄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적기로 했다.

점점 말하지 않고 못 하는 게 많아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아끼다 똥 되고 썩혔다 쓰레기만 될 거라면, 조금 미숙하고 완전치 않은 표현을 담더라도 당장의 마음을 전하는 게 좋겠다, 싶다. 이제 그때그때의 느낌과 감정을 나누고 전하는 데 인색하지 않으려 한다.

한참 뒤에 꺼낸 묵힌 마음은 왜인지 빛을 잃어 초라하다. 순간순간의 내 진심은 결코 초라했던 게 아닌데 말이다. 시간이 농익게 해주는 건 표현의 능숙함일 뿐, 시간이 흐른다고 진심의 깊이를 더하는 건 아닌 듯하다.

나눌 것도 없는데 마음이라도 나눠야지. 옹색한 마음을 언제나 값지게 여겨주는 사람에게 그마저도 아끼는 것 옳지 않다.     


이렇듯 길게 서론을 꺼내게 한 사람은 내게 무어로 이야기해도 모자랄 만큼 고마운 사람, 내 몸에 12개의 타투를 새긴 나의 타투이스트, ‘록음’이다.      

이름이 하도 예뻐 처음에 나 역시 소개를 받고 록음을 만났을 때 본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작곡을 하든, 그림을 그리든 거의 제 본명을 앞에 내밀지 않는 시대였다. 나 역시 새로 글을 준비하며 어디 기깔나는 필명 하나 뭐 없나, 하고 두리번댔으니 말이다. 여하튼 ‘록음’이라는 이름의 이미지와 이름은 타투이스트로 살기 위한 하나의 상징의 의미 같은 것이려니, 할 만큼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이름이었다.     



록음.

푸른 내음이 느껴지는 그 이름을 두고 본명이냐고 물었을 때 조금 딱딱하고도 삐딱하게 기울어져 고개를 끄덕이던 동그란 머리꼭지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작업실 벽면에 이름과 계좌번호가 쓰인 종이 한 장을 보고서 정말 본명임을 알았을 땐 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했고 곧 어딘가 묘하고 신비한 인물과 이름이 꽤 잘 어울리는 합이라 생각했다.     

아마 여태 살면서 흔치 않은 그 이름에 대해 무수히 많은 질문을 들었으리라. 록음은 여러 개의 피어싱을 귀와 코에 매단 채 흰 살결 위에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알록달록한 타투를 입체적으로 움직였다. 나비와 꽃과 풀잎이 움직였고 미지의 세계에서 온 이미지가 흰 팔 위에서 너울댔다. 그러면서 무심하게 내 몸에 타투를 새기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타투가 그만큼 많이 있는 사람을 처음 봤는데 마치 만화 같았다. 지브리의 암흑세계가 있다면 저런 음영의 그림들이 혈관 위에서 움직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한참 더 빠져 보면 실례가 될 걸 알아 어정쩡하게 시선을 돌린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마냥 다정하고 친절하지 않은 첫인상이라고 기억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만히 곰곰 생각해보면 어쩜 내 선입견이 록음의 첫인상을 조금 딱딱하고 무신경한

사람으로 정해뒀을지도 모른다.


사는 동안 타투라는 문화와 조금의 접점도 없었다. 살결을 내놓는 게 당연했던 무용을 해왔으니 더 그랬다. 그렇게 스물여덟 해를 사는 동안에는 꿈도 안 꿨고,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게 되면서야 슬며시 슬금슬금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문화에 이해도 없이 발을 들인 거였다.

유행을 따르고 싶어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불현듯 이제 결혼까지 했고 애도 있는데 못 할 건 또 뭐야, 싶었다.

언제나 그랬듯 느닷없이. 불쑥 고개를 든 에라 모르겠다, 식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록음의 작업실을 찾은 나는 부렸던 호기에 비해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다. 얼렁뚱땅 해버린 결심과 달리 괜한 겁을 먹었고 쭈뼛댔다.   


팔 한쪽을, 아니 손등과 손가락까지 빼곡한 까맣고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건 어딘가 색다른 경험이었다. ‘할 때 안 아프셨어요?’라고 묻자 ‘글쎄요.’라며 대답하던 록음은 어딘가 성가셔 보이기까지 했다.

눈치로 이미 그쯤은 알았지만, 자꾸 궁금해져 보고 싶은 마음에 몰래 록음을 힐끔댔다.

저렇게까지 타투를 많이 한 사람이 정말 있구나, 다 하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생각보다 아프면 어쩌지? 저렇게 큰 건 몇 시간 걸렸을까? 걱정과 신기함이 뒤섞였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을 벌이는 듯해 두근댔다.      



애석하게도 그 처음, 록음을 처음 본 순간에 전남편과 함께였다. 벌써 아차, 싶어서 주먹을 말아쥐었을 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난들 알았겠냐고. 이래서 사람이 한 치 앞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게 드러난다.

결코 그 누구도 이렇게 될 줄을 몰랐던 거다. 누구랑 뭘 해? 싶은 그걸, 몸에서 지워내기 힘든 타투를 그 사람과 하나씩 새기던 역사가 진짜 있었다.

안다. 역사 앞에 ‘흑’이 붙어야 하는 것을. 그나마 위안 삼을 것은 아이의 발바닥 모양만 같지, 나는 아이의 생년월만, 그 사람은 아이의 이름까지 새겨 넣었다는 거다. 굳이, 굳이 따져서 엄연히 다른 타투라는 데에 정신 승리를 해보자.     


어쨌든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못 할 게 뭐 있냐는 마음으로 함께 타투를 새기자고 꼬드긴 건 나였다.

팔뚝 안이나 뒤쪽에 작게.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전혀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 새기자고, 아이가 태어났을 순간에 찍은 발 도장을 나란히 새기자고 먼저 제안했다. 그러면서 서로와 관련된 무언가를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커플룩도 입기 싫어하는 내가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꿈꿨나 싶을 지경이다.

그렇게 거울 앞에 서서 아이 발 도장과 함께 다음에 부부의 의미를 한껏 담은 무언가, 예를 들어 둘이 처음 만난 날의 이미지나 서로의 이름 같은 거랄지. 누가 봐도 부부다! 싶은 도안이 있으면 어떻겠냐며 조잘조잘,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씁, 그런 건 안 하시는 게 좋을 텐데.’     


록음의 웅얼댐과 혼잣말 같은 작은 목소리가 처음으로 비집고 대화에 섞였다.

내내 무표정하게 작업을 준비하느라 이쪽을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는데. 어찌 보면 날카로울 정도로 덤덤하던 록음은 후회할 건 안 하는 게 좋다며 특유의 고갯짓으로 갸웃댔다.


‘이미 결혼에 아이까지 있는데도요?’ 되물음에도 록음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아이 발 도장 도안 밑에 서로의 이름을 새기는 건 어떠냐 물었을 때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는 변할 게 아니라서 아이에 관련된 건 괜찮은데 대부분 서로에 대한 뭔가를 하면 후회하세요, 라는 말로 다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긴 록음의 말끝이 너무나도 명확했다. 어쨌거나 그간 타투를 새겨간 수많은 사람을 지켜본 이의 조언이었다. 많은 커플과 많은 부부가 지금 당장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고 새겨달라 했을 터, 그 결과 역시 숱하게 알고 있을 록음의 말은 자세하지 않아도 엄청난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하고자 했던 의지는 어영부영 흐려졌다.

그땐 그런가? 어쩐지 조금 아쉬운 기분에 아이의 발바닥 도안만 시술을 받고 말았지만 지금 보니 어떤가. 정말이지 그때 록음은 거의 사람 하나 살린 수준의 조언을 한 셈이다.     


만에 하나 ‘Love Forever’ 같은 낯간지럽고 유치한 레터링이나 누구 하트, 누구 이런 느글대는 이미지를 몸에 새겼다면 정말 두고두고 벽에 머리를 박고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었을 거다.

후에 ‘내가 그때 전남편 이름 새긴다고 우겨서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라고 물었더니 록음은 특유의 재기 넘치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랬으면 어떻게든 더 멋지게 그 위에 커버해서 하나도 안 보이게 했을 거예요. 하나도 생각 안 나게. 지은씨한테는 무조건 그렇게 해줬을 거예요.’     


그리고는 한 마디 더 해줬다.     


‘멋진 여자한테 멋진 타투만 남겨야죠. 그럼.’     


나는 별안간 록음 덕분에 멋진 여자가 되었고 후회할 흔적을 남기지 않은 현명한 사람이 되었다.

세상에, 그 어느 삐끗함이어도 더 멋지게 덮을 무언가를 그려줬을 거라니.

어쩌면 매번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다른 누가 아닌 록음에게 몸을 내맡기는 건 이런 믿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망쳐도 괜찮을 무언가가 삶에 거의 없지 않은가. 뭐든 망하면 안 된다는 긴장에 바들바들하며 노심초사, 그래서 매번 조마조마하게 뭐든 고민하고 불안해하는데 내게 있어 타투는 그런 불안의 영역이 아닌 게 됐다.

     

누구나 자신만의 ‘믿는 구석’ 하나쯤 두고 위안을 얻기도 한다. 절대 실패가 없는 나만의 맛집이나, 이게 힐링이다 싶은 장소 같은 게 있을 거다. 쉽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내게는 록음의 타투와 록음이라는 사람 자체가 그렇다.     


언제였나 록음이 또 다른 타투를 새기면서 해준 말이 있다. 어디서 들은 거라며 전해준 이야기인데, 타투와 피어싱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들의 심리 이면에는 자해 욕구가 깃든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타투랑 피어싱을 계속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안 풀리는 무언가 있는 거겠죠. 나도 그렇겠고.’

지이잉, 그 말이 끝나고 까만 선이 피부에 새겨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수많은 진동으로 까만 선이 내 피부 위에 새기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무겁고 큰 진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록음의 알록달록한 팔목도 바라봤다.      


표피 아래 진피, 그 깊은 곳까지 잉크를 주입하면 더 번지지 않게 세포가 잉크를 감싸는 게 타투의 원리라 한다.

그럼 대체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얼마나 갈망하기에 이 까만 잉크와 그림을 새기며 마음을 달랠까.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상처와 괴로움을 더 번지게 하고 싶지 않은 걸까. 그러는 록음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 응어리를 표현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면서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타투이스트라는 직업과 미처 알지 못했던 부산이 고향인 어린 록음, 서울에 올라와 어찌 됐든 버티고 자리를 잡아가는 록음을 상상했다.

늘 조잘조잘 수다를 떨어대는데 웬일인지 그날만은 말을 많이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록음은 더 이것저것 캐묻지도 않고 이야기를 보태지 않았다. 묵묵히 가늘고 두꺼운 선으로 내 안을 채웠다.

덕분에 나의 상처와 새로운 어떤 것, 잊고 싶고 가지고픈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과히 정말 스트레스가 극에 치닫거나 어디로 도망가고 싶을 때, 이대로 땅 밑으로 꺼져버리거나 타노스의 핑거 스냅 하나로 태초의 나로 리셋되고 싶을 때마다 록음을 찾았다.

일이 안 풀리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도망치고 싶을 때. 미치도록 혼자 있고 싶거나 다 내던지고 싶을 때마다 새로운 도안의 이야기라도 해야 했다.

속 시원하게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도 삶이란 게 나 하나 그리 쉽게 놔주는 게 아니었다. 꾹 참고 삼키는 게 능사가 아님을 알면서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스스로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타투 속에 자해의 욕구가 깔려있다는 록음의 말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손목을 긋거나 머리를 뜯고, 뛰어들거나 내다 던지는 과감함 따위는 없는 지나친 소시민으로서 이나마 과감해 차라리 낫다 싶었다.

아니 그렇다고 무슨 타투로 스트레스를 푸냐고 할지 모르지만, 뭐든 잠시라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다는 게 내겐 어딘가 싶다.     



그렇다고 몸에 새긴 꽃과 동물들이 대체 다 무슨 의미를 깊이 지녔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의미는 무슨 의미. 의미를 부여하고 찾아 끼워 맞추다가는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지도 모른다. 내 몸에 내가 하는 것만큼은 그런 것 좀 따지지 않고 순전히 단순하고 나 보기에 예쁜 것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는 삶에서 순전히 이것만큼은 멋대로 하고픈 마음이다.

대책 없고 충동적으로 보이는가? 맞다. 너무나 충동적이고 생각 없다.

하지만 바로 거기서 짜릿함이 온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록음의 손에 내 몸을 맡기고 새겨진 까만 그림에 역시 내 안목이 옳았다며 록음과 하이 파이브를 해대며 방방 뛰면 잠시뿐일지라도 시름이 잊힌다.      


인간이 느끼는 쾌락 수치 중 감동이 20, 시험이나 자격에 합격해 성취를 이뤘을 때도 20, 좋아하던 사람과의 교제에 성공했을 때가 80, 그 사람과의 섹스가 50이라는데 나의 쾌락 수치를 검사해보면 새 타투를 새기고 거울로 확인할 때 50쯤은 거뜬히 넘길 듯하다.

그러니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선명하게 그려진 까만 선과 점은, 시절의 고비를 넘으려 헐떡대는 나의 지울 수 없는 위태로움이자 내가 내게 선사하는 쾌락이다.     

힘듦을 잊으려 섣부르게 찾아가 산만하게 구는 나를 가만히 보듬어주는 록음이 머릿속에 선뜻 그려지지 않겠지만 말했듯이 나의 특별한 위안이고 나름의 치료과정이다. 노래방 가서 소리 지르면서 노래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다소 터프한 셀프 치유인 셈이다.     


아프냐고 묻지도 않고 새 그림을 새긴 부위를 어찌 관리해야 하는지 더 알려주지 않을 만큼 익숙하기까지.

록음을 보는 날이 쌓여갈수록, 나누게 되는 대화가 깊고 다양해질수록. 같이 이런 걸 하고 여기서 뭘 먹자는 약속을 어렵지 않게 하게 되면서, 선입견 너머의 말랑말랑하고 연약한 부분을 엿보게 되면서부터는 별수 없이 그렇게 정해지기라도 한 마냥 록음을 아끼게 되었다.     


씁, 그런 건 안 하시는 게 좋을 텐데.라고 하던 건조한 록음이 이리도 사려 깊은 사람일 줄이야.

뜻밖의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캐릭터로 등장한 록음은 굉장히 신선한 매혹이었고 뜨끈히 우러난 차처럼 질리지 않는 은근함이 있다.      


나이 많고 아픈 고양이 우록이와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우록이는 록음의 곁을 떠났다. 그러는 록음 역시 함께 와서 나란히 타투를 새긴 남자와 이혼하고 홀로 키우던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 나의 근황에 대견해 죽겠다며 박수를 보냈다.


스물여섯이던 록음은 서른 살이 되기까지 내 몸에 12개의 타투를 새겼다. 또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내게 완전히 새로운 삶, 낯선 이야기를 전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스며들어 나의 일부가 되기도 했고 세상을 이해하는 시야를 넓혔다. 저마다의 개성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는 법을 배웠고 몇 년째 존댓말을 주고받아도 오히려 편하고 평화로운 사람이 있단 것을 깨달았다.          


서로 쓸모없는 가벼운 선물을 주고받으며 숨 넘어가게 깔깔댄다. 맛있는 음식 한입을 입에 넣자마자 동시에 미간을 찡그리며 우리 다이어트고 뭐고 건강하게만 살자며 쉬이 결심을 내다 버리기도 한다.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귀엽고 잘생긴 게 세상을 구한다며 큰 소리로 맞장구치는 사이가 됐다.

     


한때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흔적이 많아지고 있는 것을 두고 뭐든 해소할 수 있어 기쁘다 할지, 더 늘어나는 것이 슬프다 할지 몰랐는데 이제는 안다.

쉽게 지울 수도 없는 건데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젓는 이유 역시 잘 안다.

선택과 도망이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교차하는 곳에서 늘 나를 위로해주던 사람과 그림만으로 충분했고 충분하다. 순간의 해소라 할지언정 말이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록음이 있기에 괜찮다.

     

검고 푸르며 짙으나 높다란 록음.

언젠가 우리가 가까웠다 멀어지며 서로를 모르던 때처럼 동떨어진 세계로 빨려 든다 해도. 그래서 영영 만나지 못한다 한들, 아무래도 상관없이 록음으로 인해 치유받은 시간이 있기에 다 괜찮다.


척추뼈 한가운데를 길게 가르는 뱀 꼬리 옆, 수줍고도 또렷이 새긴 록음의 이름 두 글자만으로 록음은 영영 내 게 있을 테니.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진피를 지나 내 영혼 어디까지 아주 깊이, 록음이 그리 새겨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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