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뵈러 한 계절 만에 고흥을 내려갔다. 벚꽃 다 떨어지고 와서 어쩌냐고 하던 할아버지를 초여름에 봤었는데, 집 앞 논마다 노랗게 벼가 익어가는 계절이 되었으니 꼬박 여름을 지나고 보는 거였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한 지붕 아래 살아온 정이 있어서 그런가, 할아버지를 향한 다른 가족들의 평이 어떻든 간에 괜히 애틋하고 가까운 기분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고흥, 그 8시간의 거리가 기껍다. 가서 또 마냥 편하고 즐거울 게 아닌데도 일단은 가는 길이 괜히 좋다. 운전하느라 지루해질 때쯤이면 우리처럼 시간이 많지 않은 할아버지의 남은 세월을 가늠해본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는 최 씨 중 가장 고집 세고 감정의 기복이 크다. 소위 말하는 ‘츤데레’의 표본? 아니 그보다 더 괴팍한 성미를 지녔다. 주변에서는 그 온도 차이에 정신 못 차리고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모르는 함정이 있다. 냉탕과 온탕을 멋대로 오가는 참으로 어려운 성격을 지녔다.
84세인 지금도 그런데 엄마와 이모, 삼촌을 키울 땐 오죽했을까. ‘한 성깔’하는 데다가 요즘의 아빠들처럼 말랑하게 굴지도 않았을 젊은 아저씨인 할아버지를 상상해보면 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태어나기도 전의 히스토리를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지만, 50대가 되고 60대가 된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여전히 편하지 않게 할아버지를 대하는 걸 보면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목소리부터 커지는 거, 듣는 이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당장 당신의 화를 드러내기 위해 거친 단어만 고르는 거. 그거 굉장히 상처고 피곤하다. 주고받는 대화를 유연하게 해냈을 리가 없다고 단정해도 억지가 아니다. 할아버지는 그랬을 사람이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물론 큰외삼촌, 작은 외삼촌, 막내 외삼촌과 이모, 숙모들 모두 내 이혼을 할아버지에게 전하진 않았다. 아마 모두 엄두를 내지 못했으리라 짐작한다. 그 성격에 첫 손녀의 이혼 사실을 듣고 얼마나 길길이 화를 내고 독한 소리를 내뱉을지 벌써 그려진다.
‘다들 왜 그래? 내가 창피해?’라고 묻고 싶은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할머니의 묘에서 다 같이 모인 날, 아무도 몰래 내 손을 쓱 잡고 ‘아이고 지은아, 좀 참지. 애도 어린데.’라며 물기 어린 눈으로 한평생 참고 살아온 큰 외숙모가 물을 때, ‘그래도 이제 앞으로가 중요하지. 잘했어.’라고 막내 외숙모가 웃어줄 때도, 당사자가 괜찮은데 다들 왜 할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하냐고 묻고 싶었다.
엄마에겐 직접 묻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래서라는 명쾌한 대답 없이 잔뜩 흐려지는 엄마의 말끝을 물고 재차 물을 수는 없었다. 하긴 엄마가 더 잘 알 터였다. 엄마도 이혼해봤고 그 사실을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어렵게, 아주 어렵게 알리고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먼저 겪은 선배님이 어련했겠는가 싶어서 더 묻지 않았다. 혹시 너도 그러더니 네 딸도 왜들 그러냐는 뉘앙스의 한마디가 나왔다면. 엄마의 가슴속이 얼마나 바들바들 떨렸을지 가히 그려지고도 남는다. 그러면서 내게 ‘이혼한 너를 감추고 싶다.’라는 말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그 속이 오죽할까.
거짓말이 좋을 사람이 어딨을까.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기 싫어 때때로 속이 어떻게 곯든 입을 꾹 다무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 일에 있어 엄마의 방식을 따르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만약이지만 그랬다면 엄마가 얼마나 사무치게 슬플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내 자식에게 새겨진 상처가 괜히 다 내 탓만 같은 기분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부모에게 내 자식의 아픔을 알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멋쩍고 창피한 거,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얼추 읽을 수 있다. 나도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니 아주 조금 알 듯하다.
할아버지는 이혼 뒤 찾아갈 때마다 간간이 너네 서방은 왜 안 왔냐고 물었지만, 다행히(!) 섭섭해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서울에서 일이 많다며 얼버무렸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으레 대답도 없이 다른 질문을 했다.
휴, 하고 한숨 돌리는 엄마의 옆얼굴을 보면 나도 따라 한숨을 돌렸다. 사실 할아버지의 관심사는 손녀사위가 아니라 손녀가 낳은 아이와 본인 자식들이었다. 이럴 땐 그 배타심에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그중에 특히 하나 있는 증손주인 내 아이만 챙겼다. 볼 때마다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훌쩍훌쩍 자라나 버린 그 어린것의 모든 것만 탁해진 눈으로 열심히 좇았다.
그러다 피식피식 웃기도 하고 고것 참 못났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고기를 사놓고 기다렸다.
아이가 태어나고 100일 즈음 고흥에 처음 데려갔었다. 그땐 할머니도 살아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인생에 처음으로 증손주를 보는 날이었다. 갓 쪄낸 고구마처럼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작은 아기, 콩고물이 묻지 않은 벌거벗은 인절미 같은 아기를 안고 집에 들어서던 순간이 생생하다.
할머니는 당뇨 합병증으로 거동이 불편했다. 그 병으로 서울에 살다가 그 먼 고흥까지 내려가 요양을 하고 있었다. 잘 걷지도 못하고 뭘 보지도 못하면서 할머니는 엄마가 안고 있는 아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노인이 되면 홍채가 탁하고 흐려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 순간 할머니의 눈은 검은 옥처럼 맨들거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나마 제일 가까이 지내 온 손주들인 나와 동생을 볼 적엔 보여준 적 없는 눈동자로 할아버지는 아이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허, 참.”
할아버지가 아이를 보고 한 첫마디였다. 이제 겨우 목이나 가눌 줄 아는 아기를 너무나 오랜만에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손녀딸이 아이의 엄마가 됐다는 게 실감이 안 나서였을까. 할머니가 둔해진 몸으로 아기를 건네받고 열심히 시력을 모아 아이의 얼굴을 눈에 담는 동안 할아버지는 안아보지도 못할 거면서 아기 곁을 한참 맴돌았다.
자식을 다섯이나 낳아 기르고 열 명이나 되는 손주들이 있는데도 아기를 처음 보기라도 한 듯이. 할아버지는 내가 낳아 온 아기의 주변에서 오래 서성였다.
“잘했다.”
비록 최 씨지만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 못지않게 살아온 할아버지가 아기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나를 돌아보고 그리 말했었다. 뭘 잘한 거지? 아이를 낳은 거? 여기 데려온 거? 어쨌든 건강한 거? 대체 뭘까. 헤아리려 눈을 깜빡댔는데 할아버지가 문득 엄마에게도 이렇게 말을 건넸다.
“너도 이제 할머니냐.”
본인 딸에게 너도 할머니냐며 픽 웃던 흐뭇한 웃음이 판화처럼 굵직하고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어머나, 그러네. 아빠 나 60도 안 됐는데 벌써 할머니를 만들었어, 요게.
달랑 이름 세자 가지고 있는 주제에 온종일 먹고 자고 울고 징징대기만 하는 아기가 뭐 자랑스러운지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고 할아버지 곁에 바싹 앉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기특해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삶이 조금도 잘 풀리지 않고 하루하루 버겁고 고단할 텐데. 사는 게 더러 지옥 같고 시궁창 같은 날에 울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버티는데도. 누군가의 할머니와 엄마가 되고 살 거라는 그게 그렇게 기특했나 보다.
“밉게도 생겼다 고놈.”
내 왼쪽 뺨에 패인 보조개를 그대로 닮아 가지고 세상 밖에 나온 아기가 그리도 밉고 기특했나 보다. 어느새 뒷전에 밀린 나는 선풍기 바람에 가늘게 흩날리는 회색 머리칼만 본 게 다다. 비록 그 단면만 봤지만 할아버지의 사랑스러움과 소중함, 애틋함과 두근거림을 읽었다.
이틀만 있다 갈 건데 전복과 사골을 넣어 한 솥 끓여둔 미역국에서는 사랑과 격려의 맛이 났다. 김 첨지의 설렁탕 정도로 애끓는 애절함은 없겠지만 분명 애틋한 맛이었다.
말과 달리 할아버지는 아이를 너무나 좋아했다. 손주들에게는 설날 아닌 이상 만원 넘게 준 적 없는데 아이에게는 2만 원, 5만 원을 턱턱 쥐어 줬다. 올라가는 길에 애가 뭘 먹어야 하지 않냐며 여산 휴게소 우동이 맛있다고 몇 번이나 당부하기도 했다.
하룻밤만 자고 올라가려고 하면 뭘 그리 빨리 올라가냐고 역정도 냈다. 애 데리고 와서 여기저기 좀 구경시키고 바다도 보여주고 쉬다 갈 일이지, 이렇게 빨리 왔다가 갈 거면 귀찮고 피곤하게 왜 왔냐고 되려 큰 소리였다. 근처에 사는 이모 집에서 자겠다고 하면 애는 여기 두고 가라고도 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하루 왼 종일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을 거의 동네 방송하듯 크게 틀어두고 절대 리모컨을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는데 유일하게 아이가 보고 싶다는 게 있으면 슬며시 자리를 양보했다.
‘에라이 이 자식아. 보고 싶은 거 봐라.’ 하며 안마의자나 창가 식탁으로 주섬주섬 자리를 옮기는 모습에서 뾰족이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형태를 본듯하다. 세상에 채널 선택권을 넘기다니. 아픈 할머니가 시끄럽다고 그렇게 인상을 찌푸릴 때도 소리 줄이면 안 들린다고 하던 양반이 말이다. 송가인과 임영웅이 잠시 노래를 멈춘 순간,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는 잠시나마 쨍쨍한 트로트 자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할아버지는 식탁에 앉아 화투패를 맞추면서 브레드 이발소를 보는 증손주의 산만한 옆모습을 힐긋댔다.
남쪽의 진득하고 풍부한 오후 햇살이 가느다랗고 하얀 할아버지의 머리칼을 비추고 검버섯이 피어오른 이마와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푸르도록 희었을 흰자는 몇 번의 수술을 거치고 옥빛이 되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고기를 마음껏 삼킬 수 없게 되었지만 고집스레 꾹 다문 입술은 여전히 굳셌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의 할아버지였던 그, 젊은 할아버지 시절에 얼핏 풍기던 담배 냄새는 이제 온데간데없고 섬유유연제 같은 건 안 쓰는 바람에 오로지 빳빳한 비트 세제의 냄새만 난다. 다이알 비누와 삭은 섬유의 냄새도 난다. 그러다 ‘할아버지!’하고 달려오는 아이를 향해 느릿느릿 뒤를 돌면 순간 폭신한 목화꽃의 냄새가 난다. 귀가 그렇게 안 들려서 어느 순간부터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하고픈 말만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던 할아버지였는데. 쨍쨍하게 쨍알대는 아이 목소리는 귀신같이 듣는다.
어느 기사에서 한 어르신이 인터뷰하며 이런 말을 했다. ‘경우 없고 안하무인인 노인네고 싶어서가 아니라 안 들리고 안 보인다. 몸이 무겁다. 어느 누가 폐를 끼치고 싶어서 끼치는가.’라고.
그 뒤로 할아버지를 조금 느긋이 볼 수 있게 됐다. 그래, 본래 성격도 만만치 않은데 점점 몸이 무겁고 안 보이는 데다가 안 들리는데.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할까. 마음대로 안 된다고 울어재끼는 아이들보다 어쩌면 더 불안하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내 몸은 이렇지 않았는데, 다 되던 건데 안 되니까 그 답답함은 분명 더 클 거였다. 딱딱하게 굳은 할아버지의 발과 형편없이 가늘어진 발목을 헤아려봤다. 저 발로 뛰어다니며 버텼을 삶의 막막함을, 해도 해도 뭐가 안 됐을 젊은 가장의 막연함을 잠시나마 그려봤다.
오래전, 그런 할아버지에게서 술을 배웠다. 그때는 중2쯤이었고 가족들이 모여 집에서 삼겹살 구워 먹고 소주 한잔하는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별안간 맥주 마시는 글라스 잔에 빨간 뚜껑 소주만을 가득 채운 할아버지는 내 앞에 턱 하니 잔을 내려놓고 쭉 들이키란 제스처를 보였다.
어라, 궁금하긴 했다만 이렇게 어른들 다 보는 데서 느닷없이 원샷을 때려도 되나. 호기로운 호기심이 넘치는 소녀였던 나는 정말 겁도 없이 냅다 원샷을 했다. 그러고는 비릿하고 독한 알콜 냄새에 바로 인상을 찌푸리고 웩웩거렸다.
그 모습에 장난꾸러기 저학년 초딩처럼 신나게 웃던 할아버지의 웃음이 선하다. 아빠 그만해요,라고 적당한 웃음기를 띈 엄마가 말리는데 다음 잔을 가득 채우고 또 앞에 내밀었다.
처음부터 하트 트레이닝을 받은 덕분일까. 살면서 술 마시고 한 실수가 거의 없다. (아 물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기억 못 하는 흑역사도 있겠지. 그저 심각하게 이불을 걷어찰 실수가 없다는 뜻임을 밝힌다.) 매일 엉망진창 얼렁뚱땅 우당탕탕인데. 무색무취의 술버릇이야말로 할아버지가 내게 남긴 감사할 유산 중 하나다.
할아버지는 알콜에 한해 열린 사람이었다. 계집애가 어디 엄한 데 가서 엉망으로 술 배워서 흥청망청 헤롱 대고 다니면 인생 조지는 거라고 큰소리로 연설하던 할아버지의 위풍당당한 목소리가 생생하다. 맞는 말이었다. 애매하게 엉망으로 배운 탓에 술버릇이 거지 같은 자들을 너무나 여럿 봐오지 않았는가. 당장 나부터 호되게 당했지 않은가.
다 들이켜고 으악 소리 한 번 못 하게 냅다 입에 들어오던 상추쌈의 생마늘 냄새도 기억난다. 하, 아니 무슨 첫술로 빨간 이슬 글라스람. 아무리 생각해도 얼토당토다.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으며 얼큰하게 취했던 할아버지는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며. 놀랍게도 그러고도 몇 잔을 더 먹였다.
고흥에 내려가서도 할아버지는 술을 즐겼다. 소주는 늘 박스로 구비해뒀고 자식들이나 손주들이 오면 으레 창고에서 그 어느 냉장도 거치지 않은 미지근한 상태인 소주를 내줬다. 미지근한 소주를 마셨다면 알겠지만 차가울 때보다 유독 쓰고 아리다. 소주가 지금쯤 어디를 어떻게 지나고 있는지가 느껴진다. 고량주 같은 걸 마실 때만 느끼는 게 아니라 미지근한 소주를 마실 때도 그런 느낌이 있다. 아 지금 지나는 데가 식도구나, 짜르르하게 목구멍을 지나 내리막길로 넘어가는구나. 그렇게 으, 하고 미간을 찌푸리면 최애 술친구를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희미하게 미소를 씰룩댔다. 그렇게 미지근한 소주를 할아버지의 새로운 동네 친구들이 담가준 젓갈 잔뜩 들어간 남도식 김치와 반찬을 안주 삼아 마시면 별거 아닌데 행복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술을 잘 가르쳐줘서이겠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가버렸다. 젊은 날 고생시킨 거 갚느라고 쌔가 빠지게 간병을 하고 돌봐주던 할아버지를 혼자 두고서. 기어이 갔다. 그 말은 바로 뒤에는 팔영산이 있고 앞에는 너른 논과 밭이 있는 넓은 집에 이제 할아버지 혼자 남게 됐다는 소리였다. 아이가 되어버린 아내를 돌보느라 그 성미에 보통 힘든 게 아니었을 텐데 할아버지는 많이도 슬퍼했다.
사람에게 혼자란 대체 뭘까. 이모네 가족이 지척에 있고 여전히 운전도 가능했다. 홀로 후련히 산이며 바다며 가볼 곳이 널렸는데 할아버지는 그 뒤로 통 어딜 둘러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볼 때마다 눈에 띄게 늙어갔다.
버럭버럭 잘만 지르던 소리도 잘 안 지르고 목소리가 작아졌다. 식사도 있는 거 대충, 혼자 누워서 미스 트롯이나 70년대에 개봉하던 서부영화 채널 같은 걸 보면서 가만히 삭아갔다.
혼자가 된 후 후련하게 훨훨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는 후딱 날아 가버린 할머니의 물건은 로션 병 하나 쉽게 버리지 않았다. 얼마 전 갔을 때 할머니 화장대에서 다 써버린 로션 바닥을 봤는데 사용기한이 2019년 11월까지였다. 버리려니까 그 자리 그대로 두라며 기어코 역정을 들었다.
할머니가 살아있을 땐 철마나 고고히 피어나던 난역시 죄다 죽어버렸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어느 화분 하나 내다 버리질 않고 그대로 뒀다.
저렇게 몇 년 두면 살아나기도 한다면서. 무엇도 버리지 못한 채 혼자 그 집에서 다 이고 지고 살았다.
그러다가 더 시간이 흘러 좋아하던 담배를 끊어야 하더니 끝내 술도 많이 줄여야 했다. 관절 수술을 했다더니 얼마 안 가서 눈 때문에 순천까지 병원엘 다녔고 심장약이 추가됐댔다. 그래서 술은 아예 입에도 안 대는 식으로 살던 할아버지는 내가 도착한 저녁,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창고에서 미지근한 소주 두 병을 꺼내 왔다.
다음날 바로 서울로 출발해야 했기에 술은 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처음 내게 술을 가르치던 날같이 슬몃 미소 짓는 그 얼굴이 반가워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때 잠깐 내가 진하게 기억하고 있는 젊은 할아버지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잘 사는 거냐 어쩐 거냐.”
몇 년 내내 오지 않는 손녀사위의 안부를 스킵하기에 은근슬쩍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표면장력을 극대화한 찰랑찰랑한 소주잔을 마주하고 앉은 할아버지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런 걸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