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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가 데이지 Sep 23. 2024

말하지 않아도

베트남 라오까이에서 만난 빠오


빠오와 함께 한 판시판 트레킹 이야기 ▶ 베트남 I 인도차이나반도 지붕 위에서



밥 위에 '무'라는 음식이 '따뜻함'이라는 마법의 소스와 함께 올려진다.


아침을 맞이하며 판시판 트레킹을 마친 후, 

마을로 돌아와

빠오 가족과 함께 점심 식탁에 앉는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빠오 가족은 

내게 말을 건네지 않지만,

나의 밥 위에 반찬을 조용히 올린다.


조용히 밥 위에 얹어진 무는

따뜻하게 스며져

나의 코를 찡하게 한다.


이후 잠시 휴식을 취하는 내게 빠오는 말한다.


"데이지, 우리 마을은 사파만큼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원한다면 마을을 구경시켜 줄게."


사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빠오의 마을, 라오까이.

라오스는 조금 공기가 턱 막힌 느낌이 있다면,

라오까이(베트남)는 깨끗한 이슬이 도처에 떠 있는 느낌이다.


흐몽족 마을인 라오까이는

베트남인 보다 흐몽족 자체의 정체성을 짙게 가진다.

언어도, 문화도 베트남과 다르다.



*흐몽족: 베트남 고원지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마을을 다니면 많은 젊은이가 아이를 업고 있는 게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일찍 결혼하여 일찍 아이를 낳는다.


마을에서도 매년 1-2명만이 대학교에 가며,

대학교에 간 이들은 정부 밑에서 일을 한다.


빠오는 2024년 기준으로 25살이 된 세 아들의 아버지이다.


빠오는 올해 25살을 맞이해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부인과는 흐몽족 전통 행사에서 만났다.

신년이 되면 서로 짝을 찾는 행사이다.

나이가 들수록 결혼하기 어렵다는 부모님의 걱정을 받아 

그는 18살에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늙으면 결혼을 못 할 거라 생각한 게 어리석었지.

늙어도 결혼할 수 있더라고.

결혼을 빨리한 걸 후회해.

결혼하고 아이들이 있으니 지게 되는 가장의 무게를 위해

당장의 돈을 벌어야 해서 트레킹 가이드가 되었어.

결혼하지 않고 더 좋은 직업을 위해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트레킹 가이드 말고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많은 직업을 알고 있지 않아. 

내가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내게 추천해 줄래?"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는

어물쩍 떠오르면서 그나마 빠오와 어울리는 직업 몇 가지를 말한다.


"회계사 ···?"


"회계사가 뭐야?" 


"요리사 ?"


"이곳에서 요리사는 가족을 부양할 돈을 벌기 힘들어."


"배우 ···?"


"배우? (웃으며) 푸핫, 왜 배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음··· 빠오는 잘생겼으니까?"



되려 직업을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이유를 생각해 본다. 



누군가 빠오에게 다양한 직업을 추천해 주고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기회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애당초 생각하지 못했구나.



생각도 못한 사실에 놀라면서

나조차 다양한 직업을 알지 못하기에 느껴지는 

좁은 시야에서 슬픔을 느낀다.


라오까이 마을 거리에는 자연소리로 가득하다. 나는 그 소리를 사랑한다.

"트레킹 가이드는 쉽지 않아.

사실 내 직업은 가이드이자 포터잖아.

등산객 짐까지 들고 매번 산을 오른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난 내 직업이 좋아.

건강해지잖아. (웃음)

일을 자유롭게 조정해서 부모님 농사 일손이 필요할 때

도와드릴 수도 있거든."


빠오가 나온 초등학교


초등학교만 졸업한 그의 어머니는 

빠오가 중학교를 졸업한 뒤 농사 일손이 되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빠오를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빠오는 훗날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다고 회상한다. 

이후 그는 의사를 잠시 꿈꿨지만, 

여행가이드인 사촌의 영향으로 투어가이드 분야에 들어선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어.

다만, 고등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 지금 영어 실력이 형편이 못해.

영어가 되면 트레킹투어가이드 말고 마을 투어가이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조금씩 영어 공부도 하고,

이렇게 (데이지 너를 만난 것처럼) 사람들도 만나면서 나아지고 있어."



그의 언니와 여동생은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흐몽족은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쯤 꿈꿨던 꿈이 있지 않아?"


"그렇지. 나는 싱가포르에서 일해보고 싶었어."


"싱가포르라니! 멋지다.

훗날 아이들이 해외로 나가면 어떨 거 같아?"


흐몽족의 색이 짙은 마을이기에,

빠오도 해외보다 마을을 지키는 걸 중요시할 거라 생각하며 질문한다. 


"해외에서 일하는 건 나의 꿈이기도 해서, 

나의 아이들이 가게 된다면, 행복할 거야."


아이들의 넓은 시각을 응원하며

그는 내 질문에 긍정적으로 맞이한다.



푹푹 찌는 여름 앞에서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굽이굽이 산을 넘는 길 앞에서

더위를 식힐 겸 잠시 숨을 고른다.


시야에 포착된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나온 내게

빠오는 얼마에 샀냐고 묻는다.


"20,000동(대략 1,200원).

무슨 문제 있어?"


빠오는 아이스크림은 원래 10,000동(대략 600원)이라며

외국인을 상대로 가격을 바꾼 가게를 보며 화를 낸다.


"고작 10,000동 차이로 그가 부자 되는 것도 아니야.

진짜 부자인 사람들은 그런 거로 연연하지 않아.

외국인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고작 얄팍한 차이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거든."



"빠오, 만약 부자가 되면 하고 싶은 게 뭐야?"


"회사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어."


종종 본인의 마을을 가난하다고(We are poor) 표현하는 그이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서 자라온 삶의 터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노란색의 라즈베리. 라오까이 곳곳을 거닐며 빠오는 내게 따주었다.

우린 함께 마을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뿐이지만,

그의 과거에 질문하고,

그의 민족,

그의 마을,

그의 삶을 들으며

가슴 한 편의 아릿함을 느낀다.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의 무게 때문일까,

구성원으로 마을 사람을 위한 마음 때문일까,

본인이 나고 자란 공간을 가난하다고 말하며

본인의 삶을 조금은 후회하는 그의 뒷모습 때문일까.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물을 때, 답한 말이 떠오른다. 


"내가 일찍 결혼을 한 걸 후회한다고 했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판시판을 오르는 이유는 가족을 위해서야. 
나의 자식을 키우며 오래도록 살고 싶어. 
그것이 내 삶의 이유지."



라오까이의 계단식 논은 아름다운 흐몽족의 유산이다.


어느새 중천에 떠 있던 해는

라오까이를 둘러싼 산 뒤로 넘어가고 있다.


잠시 냇가에 앉아

그물망으로 물고기를 잡는 마을 아이들을 바라본다.



맑고 투명하게 흐르는 물소리는

장난치며 물고기를 진지하게 잡는 아이들의 마음처럼 들린다.



판시판 트레킹 이후 거의 바로 출발한 마을 구경이기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우리는 그저 냇가의 물을 바라보며

모든 피곤함을 씻겨버린다.







마을 굽이 굽이를 걸으며 본 

흐몽족의 삶의 터전.


새로운 생각을 안겨준다.


흐몽족인 빠오와 나눈 우주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속삭인다.


새로운 우주와 만나 

나의 우주는 확장된다.


나를 위해 모기장을 치는 빠오의 가족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하고 나니

시곗바늘은 10시를 가리킨다.

하나둘씩 잠자리로 가는 가족들을 따라 잠잘 준비를 한다.


펼쳐진 짐을 하나둘씩 정리하는 내게

빠오의 아내와 여동생이 수줍게 다가온다.


미소로 그들을 맞이하니,

모기장을 들고 와 나의 침대에 친다.


그저 편하게 잘 수도 있지만,

나의 안온한 밤을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이

언어가 달라 대화 한번 없지만, 존재하는 서로를 위한 마음이


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따뜻함이라는 보호막에 오래도록 보관하고 싶다.


말을 나누지 않아도 나는 그들을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빠오 집에서의 잠자리. 포근하다.


빠오의 집을 밝힌 전등이 하나씩 꺼지고,

어느새 모두가 잠자리에 들어 조용해진 공기.

때를 기다렸다는 듯 비가 세차게 내린다.


얇고 누추한 강판 지붕 위로 비가 맞닿는다.

토독토독.


살포시 지붕과 인사하는 빗소리 넘어

울려 퍼지는 귀뚜라미 소리가 내게 잘 자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조용히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준 빠오의 가족들 / by. 빠오

밥을 먹으며 내게 전통 팔찌를 나눠준 빠오의 어머니,

언제나 눈이 마주치면 내게 귀여운 웃음을 지어준 빠오의 아내,

판시판 투어를 하며 보인 빠오의 배려들,

깨끗하고 순수한 미소를 가진 빠오의 여동생 숭,

숭이 교회에서 외쳤던 기도문,

빠오의 가족과 함께 먹었던 밥,

밥 먹기 전 함께 기도했던 순간,

빠오의 집에서 데워지는 불을 보며 마신 따뜻한 물,

빠오 강아지들,

빠오의 정원,

빠오 사촌의 돼지,

집 앞 계곡까지.


소중하고, 편안하며, 따뜻한 라오까이의 밤을

행복과 감사라는 말 이외 다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준 빠오의 가족들 / by.숭


말 한번 나누지 않아도 

함께 반찬을 나누고, 

이부자리를 나누고,

서로에게 미소를 나누는

빠오의 가족을,


라오까이 거리거리를 걸으며 지은 

빠오의 귀엽고 순수한 미소도 


잊지 않게 해 달라 기도하며 

깊은 밤에 빠진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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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블로그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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