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에서 만난 하니프
플리트비체가 가진 수려한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다.
하루 종일 플리트비체에 보낸 뒤
아름다움에 매료된 채로 자그레브로 돌아가는 길.
문득 생각이 스친다.
'가만,
플리트비체에서 자그레브(수도)로 가는 차가 많을 텐데...
히치하이킹을 할까?'
생각은 이내 도로 위 치켜든 엄지손가락을 만든다.
당당히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한국 여행자를
지나치는 여러 자동차 사이로
몇 분 지나지 않아 한 차가 멈춘다.
터키인이라는 운전자 하니프는 자그레브에 함께 가자며 차 문을 연다.
히치하이크를 한 번에 성공한 사실에 기뻐하며 차에 오른 순간부터
우린 끊임없이 서로의 우주를 공유한다.
터키에서 의사로 일했던 하나 푸는
의사에 대한 터키인의 인식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독일로 직장을 옮겼다.
독일에서 일하다 주어진 휴가.
그는 유럽 여행을 하던 중에 나를 만난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내성적인 성격에 처음 연애를 최근에야 시작했지만,
상대방의 바람으로 금방 막이 내렸다.
쓰라린 마음을 감당하고 있는 그는 자그레브로 이동하는 동안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내게 공유한다.
하니프가 터키에서 일하던 시절,
앙카라에서 군인이던 상대방은 하니프를 보기 위해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번 오갔다.
"전 남자 친구는 돈 때문에
바람녀를 만난 거라고 했어.
그렇지만,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
차라리 그가 나를 속이지 않고
나에게 와서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린 자그레브로 향하는 길 위,
라스토케라는 작은 마을에 들른다.
그는 느릿느릿하게 차에서 내려 나를 뒤뚱뒤뚱 따라온다.
조그만 물레방아는 물의 흐름을 따라 빙빙 돌아가며
작은 은하수를 풀어놓은 듯,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조그만 도시 라스토케를 잔잔히 울린다.
"너는 관계를 이어감에 있어
너 자신을 알아야 하고,
네 감정을 알아야 해."
그의 바람 소식을 깨닫고 난 후,
견뎌내야 할 참혹한 심정을 느끼며
그는 깨닫는다.
"나는 신체 적보다 감정적 기만행위가 더 싫어.
육체적으로 섞는 것보다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게 더 힘든 거지.
그가 나보다 다른 여자를 더 소중히 여긴다면,
나는 훨씬 더 힘든 감정을 느낄 거야."
애정 있는 관계는 대게 헌신을 요구하거든."
그는 이야기를 이어가며 한숨을 섞어 말한다.
"마지막 데이트 때
전 남자친구는 나한테 말하더라.
'세상이 모두 너와 같다고 생각하지 마.
70%의 남자는 모두 너를 속이는 사람이란 걸 명심해.'라고 말이야.
그게 사실이더라.
그도 70%에 속한 남자였거든.
그는 나를 매력적으로 봤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지."
"하니프, 전 남자 친구가 사실 지루했다면서
그럼에도 계속 만났던 이유가 뭐야?"
"그는 내게 많은 애정을 주고, 좋은 말을 해줬어.
그는 어제나 나를 만나면 꼭 껴안아 주곤 했지.
그를 온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누군가 그에게 관심을 표해도 언제나 자신을 통제한 하니프는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고 규정하며 자신의 가치를 저지했다.
자신을 잠그며 살아간 삶에서 좋아하는 감정을 억누르기 일쑤였다.
하니프에게 상대방이 보낸 마음은
이제껏 느끼지 못한 감정을 알려줬다.
지금까지 잠겨있던 감정을 보듬은 것과 다름없이.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잖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
"나는 단지 친구와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나에게는 여행하더라도
함께 여행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듯이 말이야.
내게 관계는 정말 중요해."
바람을 당하고
트라우마로 남을 법한 과거를 돌아보면서도
그는 상대가 보인 돌봄을 회상한다.
그에게 말한다.
"하니프, 넌 정말 아름다워.
대부분의 남자는 너에게 매력을 느낄 거야."
"고마워. 그렇지만, 모르겠어."
머뭇거리며
의기소침한 그는
관계를 향한 갈망과
그 갈망이 상처가 되어 돌아온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조그만 경험을 빗대어 말한다.
"나도 많은 사랑을 한 건 아니지만,
사랑이 그런 거 같아.
내가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 나간 이 중에
나를 좋아해 준 사람은 관계가 끝나도 먼저 생각이 나더라고.
그를 좋아한 건 아니지만,
날 정말 좋아해 준 이가 종종 생각났어."
"너는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썼다면,
분명 상대방이 너를 떠올리는 날이 올 거야.
네가 진심으로 했다면,
그건 결코 헛된 감정이 아니라는 말이야."
어느덧 차창 밖으로 껌껌해진 밤과 함께
이야기는 깊어진다.
여행하며 느낀 불편함을 주제로 대화가 이어진다.
"하니프, 내가 여행하면서 의도치 않게 스킨십을 당한 적이 있었어.
불편함을 느꼈는데, 상대방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혹여 그가 잘못 만진 것일 수 있잖아."
불편함을 느낀 경험에 대해 하니프는 단호하게 말한다.
“데이지, 무언가를 만지는 거는 우연히 발생할 수가 없어.
살갗이 닿았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 불가능해.
그건 고의적인 거라고.
혹여 매우 붐비는 상황이라는 등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너는 그 이유를 모를 거야.
그러나, 네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네가 불편하다는 감정이야.
너는 확실한 그 감정으로 “손 내려놔. 나를 만지지 마.”라 말할 수 있지.
“나의 기분이 좋지 않아. 손 치워줄래?",
“왜 내 옆에 있는 거야?”라고 말하면 돼.
물리적으로 나를 만지고도 그걸 모른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만약 잘못 만진 거라고 해도,
우리는 불편함을 말해야 해."
그의 단호한 조언은 지난 여행동안 느낀 불편함을
우유부단하게 넘어간 내게 단단함을 알려준다.
"너의 손을 치워줄래?"라고 말하면 보통 상대방은 당황할 거야.
그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 때문이지.
그게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든, 상황을 변명삼아 한 것이든
네 인생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변명하지 마.
설령 그들에게 변명이 있다고 해도,
네가 그 생각을 대신할 필요는 없어."
단단하게 말하는 하니프를 바라본다.
불과 몇 분 전, 전 남자친구로 가슴 아파하던 그의 모습과 달리
단호하고, 단단한 그의 모습.
그가 하니프가 단단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본인도 많은 치료를 받으며 말할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설령 상대방이 안 만졌다고 말한다면,
우린 그냥 '그래. 그럼 지금 치워줄래?'라고 말하면 돼.'"
단단하고 견고한 그의 생각과
그로부터 나온 조언을 소중하게 흡수한다.
어느덧 자그레브에 도착한 차량에서
누적된 피로에 피곤함에 한 아름 둘러싸였지만,
내게 필요한 조언을 단단하게 하는 하니프의 말을
놓치지 않고자 안간힘을 다해 경청하며 말한다.
"앞으로도 나도 말해야지.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
두 시간이 넘는 이동시간 동안 그 덕분에 편안하게 올 수 있음에,
그가 내게 들려준 자신의 아픔과 깨달음에,
그가 내게 나눠준 자신의 단단함이 감사하다.
헤어지기 전,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내 삶의 이유는 나의 여동생과 엄마를 위해서야.
그들을 비롯해 사람 관계, 자연 관계는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지.
하니프(Hanife) 삶의 이유
하니프는 누구보다 관계를 중시하고
관계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는다.
동시에, 관계로부터 상처받는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속의 단단함을 얻었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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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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