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만난 레샤
국경의 존재가 무색할 정도로
쉥겐국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게 익숙해질 무렵
헝가리에서 슬로바키아로 넘어온다.
슬로바키아.
한국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곳을 가게 된 이유는 딱 하나.
대학시절 만난 친구가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친구는 슬로바키아에서의 삶이 지루하고
바닥이 울퉁불퉁하다며 불평하곤 했다.
'슬로바키아의 울퉁불퉁한 바닥'의 불평은 일상 회오리 속에서 잊혀졌고
육로로 쉥겐국가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중에
다음 목적지인 빈(오스트리아) 바로 옆에 브라티슬라바를 발견한다.
'슬로바키아 바닥은 얼마나 울퉁불퉁 한걸까?'
단순한 호기심은 나를 슬로바키아로 이끌었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바닥 위에서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난민을 만났다.
그와의 이야기는
무미건조한 슬로바키아를
잊지못할 공간으로 만든다.
예상 도착시간보다 늦게 브라티슬라바에 이르렀다.
예상시간에 맞춰 나를 마중나온 이는 스타니슬라브.
호스트 레샤의 아들이다.
"스타니슬라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에게 사과하며 첫인사를 건넨다.
"너가 왔으니 됐어."
담담히 반응하며 그는 집으로 가는 버스로 나를 이끈다.
미지의 공간이던 슬로바키아 사람을 처음 만났다는 설렘과 함께
하얀 피부와 훨친한 외모의 스타니슬라브를 보며 놀란 마음을 감춘다.
버스 창가 너머로 보이는 한산한 거리의 회색 건물처럼
공백으로만 가득찬 슬로바키아의 모습은 그와 이야기로 자리를 채워간다.
"브라티슬라바에서의 삶은 어때?"
"브라티슬라바는 무엇이 유명해?"
"슬로바키아 사람들은 무얼하면서 시간을 보내?"
슬로바키아를 향한 질문들에
그는 능숙히 대답을 하면서
말 미에 덧붙인다.
"우린 우크라이나 사람이야.
전쟁을 피해서 이곳에 작년에 왔어."
그는 부모님의 이혼 뒤, 엄마(레샤)와 단 둘이 브라티슬라바로 넘어온 이야기를 한다.
전쟁이 나도 조국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조부모님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있다.
전쟁으로 인한 난민의 삶이 궁금하면서도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기에
어디까지 질문이 가능한지 고민이 시작된다.
그 사이,
집에 다다른다.
레샤의 집은 도심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공간이다.
브라티슬라바 중심지에서 40분 넘게 걸려 도착한 집은
비엔나(오스트리아)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아파트 단지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레샤와 인사를 건넨다.
조금 암울한 분위기를 가진 레샤는
반갑게 나를 맞이하며 우크라이나 전통음식을 대접한다.
붉은 빛의 저녁을 먹으며 우린 서로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쟁을 피해 걸어서 국경을 넘어 슬로바키아에 왔어.
여기 온 뒤에 처음으로 여행을 시작했지."
꽤나 염세주의 적인 감정선을 풍기는 레샤.
말의 어조나 분위기에서도 조금 음울함이 느껴진다.
레샤는 슬로바키아에 함께 넘어온 우크라이나 난민 친구와 호스텔에서 살아왔다.
몇 달전까지 개인 공간없이 살아오다 운좋게 해당 집을 구한 것이다.
"슬로바키아 정부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아파트를 지원해주기에 임대료를 내지 않지만.
계약이 내년까지야."
그의 목소리는 그 이후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감에 떨고 있다.
돈과 관련해 많은 난관에 부딪히기라고 한 듯
그와의 대화는 돈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성격자체가 차분한 것을 넘어
그의 삶이 그를 가라앉는 차분함을 만든건 아닐까.
그것이 현실적이라며 얼버무릴 수 있지만,
그에게 느껴지는 차분함과 그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우러나는 우울감은
그가 삶에 치여오며 녹아든 흔적을 보여준다.
"블라티슬라바의 밤을 느껴보지 않을래?"
레샤는 저녁을 정리하며 내게 묻는다.
슬로바키아의 밤을 즐긴다는 상상에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우린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에 오르는 승객,
거리 위를 걷는 시민 전부
얼굴에 어떠한 표정이 없으며
단조로운 거리를 일부 건물만이 메꾼다.
그 풍경은 조금 차가운 느낌마저 든다.
슬로바키아가 하나의 연극이라면
표정없는 인물들의 힘없는 몸짓을 보는 느낌이다.
일부 인물은 인상을 짓는 듯한 모습도 느껴진다.
음울하고 우울한 분위기는
레샤를 향한 내 질문을 더욱 조심스럽게 만든다.
"가족이 그립지는 않아?
브라티슬라바에서 사는게 힘들 것도 같아."
"힘들고 그립지.
그치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대포소리가 나지 않잖아.
대포 소리를 들으며 불안전하게 사는 것보다는 나아."
그의 대답은 단순하지만
충격 그 이상으로 뇌리에 박힌다.
고작 정부지원 낡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삶만을 보고 던진 질문은
대포 소리 나는 전쟁에서 지내온 레샤의 삶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전쟁을 겪으며 느꼈을 불안과
일상은 파괴한 각종 죽음과 공격은
내가 당연히 누려온 평화라는 이름에 지워지고 있었다.
"레샤, 내가 전쟁에 대해 잘 몰라서
함부로 질문하지 못할 거 같아."
"여전히 나에게 상처로 남아있는 순간이야.
아직 대답하기 힘든거 같아."
그의 답변을 듣자마자
나의 질문과 호기심으로 인해
그의 아픈 기억을 다시 가져온것은 아닐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공감하는 척밖에 못할 순간 앞에서
나는 질문하기를 멈춘다.
올드타운을 밝히는 건물 불 빛 중
오데사 체리와인(Drunk Cherry)을 발견한다.
우크라이나 브랜드의 와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해 한 잔씩 잔을 기울이게 한다.
작은 한 병을 비우며 대화를 이어간다.
"한국도 1950년에 전쟁이 있었어.
오늘 날에도 전쟁이 사라진게 아니지.
우리는 휴전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여전히 전쟁이 끝난게 아니야."
레샤가 겪은 전쟁의 참혹함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지만
레샤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한국은 다른 국가보다 안전하게 지내고 있잖아.
그건 전쟁이 아니야."
전쟁의 피해를 느끼지 않았으면 모를 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도 전쟁 중이라 왈가왈부하기보다
참혹함 속에서 탈출한 레샤 앞이기에
더욱 언행을 조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 깊어진 브라티슬라바의 거리는
잔잔한 고요함이 울퉁불퉁한 바닥 돌멩이 사이를 비집고 가라앉는다.
소박하고 작은 거리는 늦은 밤이어도 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한적하고, 조용한 냄새 위를 차분하게 걷는다.
우크라이나에서도 교사였던 레샤는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치며 돈을 벌고 있다.
다른 난민들처럼 공장에 취직해 돈을 더 많이 벌수도 있지만,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더 좋다고 말한다.
집에서도 기타 현을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한다.
많은 돈을 벌기보다
자기에게 더 가치있는 일을 하고 싶은 레샤.
그는 대화 중에 경제적 어려움을 매번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고자 노력한다.
"훗날 돈을많이 벌게된다면,
아이들을 위한 자선 단체를 돕고 싶어."
"어른들도 자기 마음 속에 어린아이를 갖고 있어야 해."
"레샤, 너도 너의 어린아이를 갖고있어?"
매번 무뚝뚝하던 그의 표정에
작은 미소가 번진다.
"가끔(웃음)"
42살의 레샤.
엄마 또래의 우크라이나 사람과 함께
브라티슬라바 거리를 걷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나를 위해 도시 구석구석을 소개하고
자기의 아픈 이야기를 공유해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동시에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내 삶의 이유는 나의 아들이야.
나는 아들을 위해서 삶을 살아가.
귀뚜라미 소리가 슬로바키아의 밤을 감싼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산책하면서 종종 들었던 귀뚜라미 소리도 생각난다.
레샤도 어릴 적 자신의 고향에서 들은 귀뚜라미 소리를 떠올릴까.
슬로바키아의 밤 바람 내음새를 물씬 맡으며
고요하고, 평온하며, 한적한 공기를 느낀다.
더 이상의 전쟁으로 피해받는 이가 없기를 기도하며
조금은 가라앉은 듯한 슬로바키아의 밤을 껴안는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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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