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에서 만난 랜스
외로움을 받아들이면 고독이 된다.
고독은 스스로 결정한 삶의 태도이고
외로움은 타인이 주는 감정이다.
외로움은 당연한 감정이다.
그렇기에
외로움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전력질주하듯이 유럽여행을 했다.
유럽여행의 마지막 국가인 이탈리아에 이르니,
내 몸은 미친 듯이 '아무것도 안 하기'를 원한다.
오빠는 베네치아로 여행을 가고
나는 로마에서 휴식을 취한다.
카우치 서핑을 통해 내게 먼저 연락을 준 호스트, 랜스
나의 휴식은 랜스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올해 54살로 로마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영국식 발음은 그가 영국인이란 걸 숨기지 못한다.
랜스는 아는 것도,
해본 경험도 많다.
말이 끊이질 않는 그의 라디오는
나의 한 가지 질문에
수많은 수다를 쏟아낸다.
"랜스, 저기 붙어있는 포스터들은 다 뭐야?"
"저 그림은 *다자연애, 반무성애, 상호적성적 지향 ···을 의미해."
"그게 뭐야..?"
수다 속에서
배움을 하나씩 가진 채 대화가 이어진다.
그의 말속에는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가득 담고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그는 하나씩 설명을 시작한다.
*다자연애 (Polyamory): 서로를 소유하거나 독점하지 않는 다자 간의 사랑
*반무성애(demisexual:): 타인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정서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눈 상대일 경우
*상호적 성적지향 (Reciprosexual) : 처음에 상대방이 자신에게 성적 끌림을 느낄 때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그와의 대화는 새로운 세계를 가져온다.
언제나 '사랑'에 있어 일대일 관계만을 생각해 온 나는
다자 간의 사랑으로
동시에 여러 명을 사랑할 수 있다는 개념을 처음 떠올린다.
"우리가 한 명만 사랑해야 하는 법은 없어.
그건 사회가 만들어낸 제도일 뿐이야.
서로의 소유욕에서 벗어나는 거야."
관습에 익숙한 사랑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의 개념을 가져다준 랜스.
랜스는 사랑은 의무가 아니라 말하며
다자사랑 경험을 공유한다.
누군가를 동시에 좋아할 수는 있지만
사랑은 동시에 불가능이라 생각해 온 나는
'다자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생각해 온 '윤리'에 맞는지 의문이 들면서도
랜스가 사랑하는 방식이 놀라우면서도 재밌게 다가온다.
"한 번은 생일선물로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관계 맺는 걸 영상통화로 선물해 줬어."
"뭐라고...?
너는 그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단 말이야..?"
"아주 조금 시샘이 나긴 했지만,
나는 선물에 매우 만족했어."
비독점적 사랑의 형태가
극단적일 정도는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를 나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상대와 철저하게 합의를 하고 이루어지지.
상대방도 다자사랑주의자가 아니라면,
동시에 사랑하지 않아."
투명한 다자 관계를 기반으로
서로를 소유하거나 독점하지 않는 관계.
의도가 무엇이든지
서로의 합의 아래 이루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기에
나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으로 개념을 받아들인다.
*나를 잊고 모두를 사랑하는 것은 다자사랑의 목적이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지
참된 '나'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에게 여러 가지 수업을 받고 나니
'사랑'에 대해 다양한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언제나 순수히 상대방의 마음을 향한 사랑만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사랑의 상대성은 그 어떤 가능성도 만들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어떤 파괴성도 가진 다는 것을.
*별표 표시된 문구는 [0원으로 사는 삶]에서 일부 발췌했습니다.
처음 듣는 용어와 개념, 개방된 성적 대화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는 신기해한다.
"너는 매우 영적이고, 세계를 보는데 매우 열정적인데,
성적으로는 잘 모르는 게 매우 이례적인 일이야.
21살인데 내가 섹스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잘 모르는 게 신기해."
그는 나에게 조언을 덧붙였다.
"네가 안전하게 여행하려면, 너는 섹스에 관심이 없다는 것,
너는 남자친구를 갖고 싶지 않다는 걸 확실히 해야 돼.
나는 그냥 여행하면서 세상을 보고 싶은 거뿐이야.라고 확실히 해야 돼."
하루는 수다스러운 랜스에게
푹 쉬고 싶다고 말한 뒤,
하루 종일 여행 사진을 정리한다.
지난 여행이 너무 찬란해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감사해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훌쩍 거린다.
랜스는 그런 나에게 휴지를 가져다준다.
그가 건넨 휴지에 멋쩍게 웃으니
수다스러운 면모는 사라지고
나의 눈물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옆을 지킨다.
이후, 저녁을 먹으며 랜스는 말한다.
"어릴 적에는 슈퍼영웅이 되는 게 꿈이었어.
1970년대 당시 배트맨이 되는 건 대유행이었지"
외롭고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의 랜스.
1970년에 태어난 그는 2년 후,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
부모의 관심이 남동생으로 가게 된 것을 원망하던 그는
어릴 적부터 남동생과 친하지 않은 이유가 된다.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가족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약점을 내보이며
본인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준다.
"난 자존감이 언제나 낮은 아이였어.
엄마에게 항상 욕을 먹으며 자라왔지.
늘 무언가 부족한 아이였지."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
상처로 얼룩진 젊은 시절,
공격성과 좌절감에 대처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만약 네가 무언가를 잃지를 걱정한다면,
나의 십 대는 매우 비참하고, 슬픈 마음으로 가득 찼어."
외롭고 고독한 유년 시절을 돌아보는 그에게 말한다.
"외로움은 당연한 감정이잖아.
외로움을 받아들이면 고독이 되는 거야.
고독은 스스로 결정한 삶의 태도이니까."
고독을 감싸 안은 랜스는
본인 안에 있는 마음을 대처하는 데의 도움으로
랜스는 어엿 아마존에 17권의 책을 집필한 작가가 되었다.
"우와!
나도 너처럼 나중에 책을 쓰고 싶어.
이 세상은 하고 싶은 일들로 정말 가득한 거 같아."
"아니,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
내 안은 부정적인 걸로 가득 차있어."
그는 언제나 아름답게만 삶을 보려는 내게
단호하게 조언한다.
"데이지,
뭐든지 긍정적으로만 보려고 하지는 마.
부정적인 건 언제나 있어."
그의 말에 공감하며
그의 삶을 포옹한다.
나의 포용과 공감은
그의 인생 조언을
귀담아듣는 행위로 이어진다.
"누군가 너에게 부정적 에너지를 준다면,
그들에게 당당히 말해."
어린 시절과 젊은 날, 랜스가 쌓아온 내면의 부정은
여전히 랜스를 괴롭히고 있었다.
감정을 풀어내지 못한 그는
과거를 곱씹으며 내보내지 못한 감정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28년 전, 나를 떠난 여자가 있었어.
그 여자는 내 얼굴에 커피를 쏟고 내 여권을 가져갔어.
그때의 감정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어."
그는 아픈 어린 시절을 넘어
젊은 시절의 상처를 보여주듯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난 여전히 그가 암에 걸리길 저주하고 있어.
죽더라도 매우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어."
주위는 랜스에게 무정하게 말했다.
'표현하지 않은 너의 잘못도 있어.'
그는 잠시 침묵한 뒤 말을 이어간다.
"데이지,
할 수 있는 만큼 네 안을 비워.
(Speak your mind as soon as you can)
그러지 못하면, 무언가 너를 괴롭힐 거야.
뭔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면,
가능한 한 빨리 그걸 움직이려고 노력해.
네가 느끼는 그 감정을 억압하려고 하지 마.
네가 해야 하는 건 단지 그 감정과 소통하는 거야."
자신을 이루는 여러 감정 속에서
본인이 지내온 삶을 바탕으로 내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그.
그가 살아온 삶의 파노라마를 짧게나마 공감하며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내 삶의 이유는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
앞으로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기 위해서야.
나는 힘든, 부정적인 과거를 보냈기에
삶이 앞으로 어떻게 더 나아질지를 믿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를 믿어.
이건 다음 경험으로 가기 위한 훈련과정인 거야.
새로운 경험, 부정적 감정을 맞이하는 법인 거지.
로마에서 지내는 동안
랜스는 내게 본인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수다스럽고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
다자 사랑을 추구하며 본인의 깊은 신념을 가진 모습,
가족 간 불화와 아픈 어린 시절을 품은 고독한 모습,
그리고, 지난 애인에 대한 화로 이글거리는 모습까지.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 삶의 조언은
그를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세계와 함께
내 세계관을 확장시켰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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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