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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가 데이지 Jul 18. 2024

변하지 않는 상황 속 변할 수 있는 건 우리의 태도야

인도네시아 바탐에서 만난 나빌라


여인숙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잘랄레딘 모하마드 루미 Jalāl al-Dīn Muḥammad Rūmī_1207-1273




시를 각색해 작가 류시화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여인숙에 함께 머무는 여행객이다."


사진: Unsplash의NASA



일주일간 바탐에 머물며 만난 나빌라는 내게 류시화의 말을 알려주었다.


인도네시아 바탐에서 호스트 나빌라와 일주일을 보냈다.

방문걸이에 살포시 과자와 음료수를 걸어둘 때, 

시간을 써가며 내 문제를 함께 고민해 줄 때,

그저 누워만 있는 내게 방문을 두드려 

함께 식당에 다녀오지 않겠냐고 물을 때, 

질문투성이인 내게 꼼꼼히 답을 해줄 때,


나빌라는 말이 아닌 표현으로 내게 일러주었다.

우리는 모두 지구촌에서 지구를 함께 공유해 살아가는 여행객이라는 사실을.


나빌라는 자신의 우주를 내게 공유했고,  나는 그 우주를 흡수하고자 내 우주를 공유했다. 


인도네시아 조그만 섬, 

바탐에서 나눈 우리의 우주 이야기를 시작한다.





15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세계일주에 오른 지 어느덧 일주일, 동아시아를 떠나 동남아시아로 향한다. 

동남아시아 여행의 첫 번째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조그만 섬, 바탐(Batam)에 도착한다.

인도네시아 바탐 도로 위에서

바탐은 수도인 자카르타와 달리 많은 편의 시설이 조성되어 있지도 않고, 휴양지인 발리와 달리 다양한 관광 상품이나 섬이 가진 고유문화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에게는 골프로 나름 알려진 섬이지만, 여행자에게 바탐은 인도네시아를 이루는 수많은 섬 중 그저 한 섬일 뿐이다. 

그러나, 바탐에 일주일 동안 머무르게 된 이유는 잠시 여행을 재정비하기 위해서다. 



여행자 커뮤니티 '카우치서핑'을 통해 만난 Nabillia(아래 나빌라)는 내게 일주일 동안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함께 나시고랭을 먹고, 산책을 즐기며 서로의 우주를 공유했다. 나빌라의 얘길 들을수록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도 내 문고리에 간식을 걸어두는 기척 소리를 듣고, 그를 붙잡아 살며시 물었다.


데이지 꽃과 함께 방긋 웃는 나빌라

올해 서른 인 나빌라는 인도네시아 바탐에서 태어나 자라왔다. 그는 6살 때는 자카르타 옆 도시 Bogor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도 졸업해 더 큰 도시에 나갈 수 있었지만, 편찮은 엄마를 돌보고자 2015년에 바탐으로 돌아왔다. 


나빌라의 어머니가 19살의 풋풋한 소녀였을 당시, 그는 34살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20살이 되던 해, 그들은 나빌라를 낳고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10개월을 나빌라 곁에 있다 세상을 떠났다. 고작 스무 살에 10개월 아기를 홀로 책임지게 된 어머니는 힘든 싸움을 시작했다. 투쟁의 고됨은 나빌라에게 돌아갔다. 조금씩 자기 딸에게 정신적, 물리적으로 학대를 하기 시작했다. 단순 수학 문제를 틀렸다는 이유로 아이를 벽에 밀치고 때리는 식이었단다. 


나빌라를 감싼 흰색 히잡은 옅은 분홍색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지만, 나빌라가 견뎌온 지난 세월의 아픔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나빌라에게 행한 폭력을 들으며 조금씩 주먹이 쥐어지는 내 모습을 보고 나빌라는 말을 잇는다.


"나는 어머니가 내게 했던 짓들을 미워하지는 않아. 나는 그를 이해하기 때문이야. 모두에는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대처하는 법이니까."


나빌라가 7살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계부와 새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아우렐리아라는 예쁜 동생도 생겼다. 이야기하며 나빌라는 옆 아우렐리아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다. 새 가족을 만나 그동안 나빌라가 동생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었을지 짐작한다. 


상황이 나아진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 받은 학대는 보이지 않는 자국을 남겼다.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데 서툴렀으며 발생한 모든 일이 자기 탓이라고 여겼다.


그는 전 남자친구의 강압적인 태도와 폭행을 그저 이해하려고만 했다. 당시 술에 취한 전 남자친구는 나빌라가 원치 않음에도 강제로 나빌라를 거칠게 다루었다. 지금에서야 성폭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 19살이던 그는 단추가 완전히 나간 셔츠의 매무새를 잡고 울며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에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한 순간, 모든 게 변했다. 실제로 그가 받은 상처는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너에게 행하는 행동, 상황은 변하지 않아. 네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너의 감정, 너의 태도야. 너는 그걸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해." 


나빌라는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남에게 표현하기 시작했고, 타인의 감정에 경청했다. 누군가의 숨겨진 감정도 무시하고 싶지 않은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나빌라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신의 삶의 이유, 당신만의 '데이지'는 무엇인가요?"



'희망'이라는 꽃말을 가진 데이지. 나빌라는 질문을 듣고는 잠시 숨을 고른다. 

줄곧 깊은 본인의 상처를 인정하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는 연습을 많이 해왔다는 듯하다.

짧은 정적을 깨고 그는 말문을 연다.



"내 삶의 이유는 모두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길 바라는 거야.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기에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짙은 상처가 아문 것은 나빌라 본인의 깊은 이해심이라는 처방 덕분인 걸까. 이해라는 무기를 가진 나빌라는, 삶에 있어 누구보다도 강한 전사와 같았다. 


"언제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 너는 단지 그 일에 대해 우울해할지, 아니면 괜찮아져서 삶을 계속 나아갈지 선택하면 돼. 삶은 역동적이야. 우리는 역동성 안에서 그저 선택하는 거지."


우리가 빛을 잘 발견하는 순간은 정작 어둠 속에서다. 마찬가지로 슬픔이 있기에 행복이 있고, 사무치게 슬픈 감정을 느끼기에 행복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트라우마에서 스스로를 마주하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승화시킨 나빌라는 행복의 원리를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한 것이 아닐까. 나빌라를 보며 오늘도 자신을 감정을 두려움 없이 마주하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려는 우리 모두의 삶을 떠올린다.






#. Epilogue 나빌라가 내게 나눈 우주의 일부


나는 이루고 싶은 체크리스트가 있어.


1. 누군가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그러므로 지금 내가 회사를 차려서 일을 하는 거야. 좋은 공동사업자와 잘 가꿔가고 있지. 


2. 나는 여행하고 싶어. 우선 좋은 컨디션을 가져야지. 1년마다  색다른 장소에 가보고 싶어.


3.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고 싶어. 속상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셔보기도 했지만, 내게 별로 효과가 있지 않더라. 그래서 나는 우는 거로 방법을 바꿨어.


내가 A를 얻으려고 했지만 못하면 나는 B나 C를 얻으면 돼.

나는 매우 융통성 있었고, 자신을 옥죄려고는 하지 않았어. 나는 적응력이 강했어.



LIFE GOES ON.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삶을 살더라도, 언제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

너는 단지 선택할 수 있어. 너는 선택을 통해 우울해하거나 슬퍼할 수 있고

또는 너는 괜찮아져서 너의 삶을 계속 나아갈 선택이 있는 거야.




당시 19살이었던 어머니는 34살의 아버지와 결혼을 했어. 1년 뒤에 나를 낳았지만, 10개월 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지.


20살이 되어 아비 없이 아이를 가진 청년에게 삶을 투쟁이었지. 남편은 없지, 아이는 있지 ··· 막막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거야. 투쟁의 결과로 그는 나에게 물리적으로 학대를 했어.


엄마는 나의 머리를 으깼어. 벽에 부딪히기도 했어. 내가 바퀴벌레를 무서워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나를 목욕탕에 벌로 가두기도 했어. 목욕탕에 바퀴벌레가 있었거든.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학대를 마다하지 않았어. 엄마는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몰랐어. 아마 그가 더 나은 방법을 알았더라면, 더 좋은 부모가 되었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엄마를 미워한 적이 없어.

그가 내게 했던 것들에 대해서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아. 왜냐면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 때문이야.

"Everyone has their own way to cope with."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은


"Traumas are not just things that you have experienced, but traumas are all should things that you did not experience"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네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는 너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해야 해.

나는 너의 감정을 읽을 수 없으니, 너의 감정을 내게 말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의 해결 방안을 함께 찾아가는 거야.

나는 어떠한 감정도, 누군가의 숨겨진 감정도 무시하고 싶지 않아.

그게 내가 가족에게서 배운 거야.




일본 격언이 있어. 


Always have 3 versions of truth. (진실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어)

I'll tell people my version of truth. (나는 사람들에게 내 관점의 진실을 말하지)

You'll tell people your version of truth. (너는 사람들에게 네 관점의 진실을 말할 거야)

And then there is a middle. The actual truth. The only that can see the actual truth is the netural. (그리고 그 사이의 중간지점이 있어. 진정한 진실. 진정한 진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건, 그 사이야.)


나는 항상 두 가지 방식으로 다 보려고 노력했어. 우리는 그걸 공감이라고 말하지.


나에게 있어 중요한 기준은 이해심이야. 사람을 이해하는 것. 왜 그 사람은 그렇게 행동했을까? 생각해 보는 거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처럼 생각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삶은 파란만장해. 너는 그냥 고르는 거야.

Whatever fuck you, Fuck you.






행복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야. 너의 목표로 가는 과정인 거야.

행복한 하루를 갖는다는 것은, 과정에서 찾을 수 있어. 내가 믿는 건 그거야.

네가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야.

매일 행복을 느낀다면 우린 그게 행복인지 모를 거야.

네가 매일 어둠을 느낀다면 너는 거기에 빛이 있을 거라고 모를 거야


나빌라 너는 언제 행복한데?


매우 많은 순간이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등…. 모든 사람에게 행복은 다르게 정의되지. 정확한 행복은 없어.


나빌라 친구들과 함께한 당구 / 나빌라의 소개로 진행한 학원 강연


우린 종종 친구들과 함께 당구와 배드민턴도 치고, 요가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남편에게 폭력을 당해 이혼을 한 뒤, 새로운 사랑을 만났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는 친구,

신혼부부가 되어 말레이시아로 신혼여행을 갔다 아내 쇼핑 시중만 들고 왔다며 웃는 친구,

배시시 웃는 제키와 나를 엮으며 놀리는 친구들,

한국이 좋다며 내게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 나누면서

삶을 살아간다는 건 뭘까 고민했다.


친구들은 언제나 어린아이 같은 웃음과 행복을 가졌고, 그들로 인해 내 세계는 점점 넓어졌다.

우리가 함께 나눈 웃음, 우주, 시간은 '나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나빌라 친구들과 함께한 배드민턴과 뒷풀이


조금씩 여행의 여유가 내게 스며들고 있다.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지 깨닫는다.


황혼에 물든 창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달콤한 바탐에서의 시간을 음미한다. 


정신없이 달려온 한국에서의 시간,

허겁지겁 출발한 세계일주,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까지.


나를 감싸온 시간에 잠식된 날들은

나빌라가 나누어준 친절과 

일주일 간 바탐에서의 휴식으로 녹아졌다.


나는 다시 비행할 준비를 마쳤다. 










*일러두기: 글에 나온 호스트는 여행자 커뮤니티 '카우치서핑'을 통해 만난 호스트입니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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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블로그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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