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공식적으로 운동을 쉬는 날이다. 주 6회 90분 간의 무분할 운동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 오고 있으니 일요일 하루쯤은 쉬어도 좋지 않겠나 싶어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명분은 근육에 휴식일을 주겠다는 것이다. 어쨌건 간에 저녁을 먹고 시내에 잠시 볼 일을 보러 갔다 왔다. 집 근처 지하철 역에 내려 수십여 개의 계단을 오르다 문득 휴대전화의 시각을 확인했다. 조금만 있으면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겠다며 아침에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올 시각이었다. 넉넉잡고 삼십 분만 있으면 올 것 같아 내친김에 기다리기로 했다.
원래는 가방 속에 든 책을 꺼내 읽을 생각이었다. 한창 읽다 보면 어느새 아들이 올 테니 마냥 지하철 개찰구만 쳐다보지 않아도 되니,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선 가장 제격인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도저히 책에 집중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지상과 지하철 승강장의 그 중간 지점인 대기실(대합실)이다. 대략 10분쯤의 간격으로 들어오는 상하행차에서 쏟아져 나온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개찰구를 빠져나가고 있다. 물론 나는 아들이 내리게 될 방향의 열차만 확인하면 된다. 말은 수십 명이라고 해도 내가 있는 곳이 번화가가 아닌 이상 그래 봤자 몇 명 되지 않는다. 하루 종일 공부하다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돌아올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생각하는 것도 녀석을 기다리는 또 다른 묘미가 아닐까?
즐거운 상상만 하며 책을 읽던 중에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 넓은 대합실을 오직 한 방향으로 돌면서 입으로는 연신 무슨 소리를 반복적으로 읊어대고 있었다. 나처럼 대기실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정신 사나우니까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당신이 내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우니 좀 조용히 해 줄 수 없겠냐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주변의 시선 따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건 말건 간에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다는 표정이 역력한 사람이었다.
"저 사람, 미친 사람 같은데?"
1미터 정도 옆에 떨어져 앉은 어떤 사람이 잔뜩 소리를 죽여 내뱉은 말이었다. 분명히 내가 봐도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워 보이는 사람이긴 했다. 적어도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그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기실 한가운데에 있는 원형 기둥을 중심으로 만들어 놓은 돌 벤치에 앉아 있는 몇몇 사람들이 슬슬 긴장하기 시작했다. 정말 우리의 생각처럼 그가 미친 사람이라면 저러다 갑자기 우리가 앉아 있는 곳으로 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걸어오거나 뜻밖의 행동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문득 그가 이 공간에 있다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내뱉는 그의 말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로 열심히 글을 쓰는 척하면서 나는 그의 말을 유심히 들어 보았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의 존재를 느낀 뒤부터 나는 어느새 읽던 책을 가방 속에 넣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으니까.
꽤 큰 음성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의 말이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얼핏 들으면 중국말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생김새도 어딘지 모르게 중국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작 그 나라의 말을 모르는 나로선 설령 그의 말이 중국어라고 해도 그 의미를 알 도리가 없다. 대략 일이 분쯤 귀를 기울였던 것 같았다. 그의 국적이 중국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말은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듣고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라고 해도 알음알음으로 들어보았던 중국말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방언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무려 삼십여 년 전에 교회를 다닐 때 통성 기도회에서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사람마다 방언의 형식이 다르다고 알고 있다. 건성으로 들었을 때는 방언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똑같은 소리를 내는 것 같아도, 만약 그것을 글로 옮겨 적으면 다른 음절과 어절로 나타낼 수 있다고 했다. 더군다나 방언은 이삼 년 가까이 내가 주기적으로 들어온 말이었다. 그렇게 익숙한 방언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결국 그가 끊임없이 뱉어내는 저 알 수 없는 말은 중국어도, 또 방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나이가 지긋한 여자분이 속삭이듯 그를 단정 지은 것처럼, 그의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겠다.
감사하게도 그는 자신이 돌던 그 궤도를 이탈하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소리를 크게 내며 시종일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제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 건 성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타인을 해코지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보며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못내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