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각, 정확히 저녁 8시 49분. 따뜻한 방 안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거나 글을 써도 딱 좋을 때에 무턱대고 집을 나섰다. 더 가관인 건 행선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란 점이겠다. 평소 같았으면 운동을 갔어야 할 시각인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하루쯤 쉬고 싶었다.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하나 준비했다. 동네 한 바퀴 돌고 오겠다고 했다. 다 늦은 이 시각에 굳이 하며 아들이 의아해했지만, 마치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중무장하고 나서는 내 발길을 붙들 수는 없다.
이것도 어쩌면 병이 아닌가 싶었다. 역마살, 아니 그렇다면 역마병쯤 될까? 실컷 집에 잘 있다가도, 샤워를 끝내고 몇 시간 뒤면 잘 준비를 해야 하는 이때에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을 때가 닥치곤 한다. 그럴 때 설령 반월당역 메트로 광장으로 가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오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집을 나서고 봐야 한다. 핑곗거리가 하나 더 있다.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빈틈없이 챙겼으니 가서 글이라도 쓰고 오겠다는 다짐까지 해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는데도 기어이 이렇게 신발을 신고 만다.
첫 번째 핑곗거리는 말 그대로 구실에 불과했다. 이 추위에 무슨 동네 한 바퀴씩이나 돌 일이 있을까? 그런데 두 번째는 제대로 적중한 셈이다. 집을 나선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글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소재가 없다는 것, 또 주제도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즉 그냥저냥 한 글을 쓰고 있다는 얘기다. 뭐, 그러면 또 어떤가? 어쩌면 마냥 붓 가는 대로 쓰고 있으니 그야말로 수필을 쓰고 있는 중이다. 끝을 맺을 때까지는 어떤 모양새를 갖추게 될지 나는 모른다.
어차피 아내가 해달라고 부탁한 일은 1시간 전쯤에 마쳤다. 대략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일을 금요일 밤부터 조금 전까지 사흘에 걸쳐 끝냈다. 개수대에 놓여 있던 저녁 설거지 거리도 해치웠다. 집에 사람은 몇 명 있어도 내가 하지 않으면 할 만한 사람도 없다. 물론 거기에 대해 불만은 전혀 없다. 게다가 나오는 길에 음식물 쓰레기도 버렸다. 할 일을 다하고 집을 나서니 붙잡을 명분도 없었을 것이다. 날씨가 춥다는 것만 빼면 이 시각에 잠시 나갔다가 온다고 해서 가족들이 걱정할 일 따위는 없었다.
발길을 돌리다 보니 오게 된 곳이 지하철역이었다. 갈 곳도 없으면서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탔다. 마치 당연히 타야 할 열차인 듯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의외였던 건 지하철 안이 텅텅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시각에 집을 나온 게 내게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사는 곳이 변두리 쪽이니 아무래도 나처럼 중심지로 이동하는 사람보다는 들어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탓일 터였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하며 모처럼 만에 편하게 앉아서 가고 있다.
선 채로 이동할 때는 미처 그럴 경황이 없었는데, 앉아서 가다 보니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관찰할 여유가 생겼다. 일요일의 밤이 다 지나고 있다는 실감을 그들의 표정에서 읽는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아도 다들, 뭘 했는지 모르겠는데 주말이 훌쩍 가버리고 말았다는 아쉬운 눈빛이 가득하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들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들뜬 기분으로 주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불과 몇 시간 후면 다시 그 지긋지긋한 직장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저렇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만 것이리라.
이제 두 시간만 있으면 잠에 들어야 한다. 결국 이 꿀 같은 휴식도 딱 그만큼만 남은 셈이다. 대략 다섯 시간쯤 의식 없이 잠들어 있다가 깨면 월요일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한다.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그리 비관적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다.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금요일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