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다정 Jul 09. 2021

천천히의 미학

한숨이 아니라 한 숨 내쉬며


멍게, 성윤석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곱씹어본다. 시 속 내용이 상상된다면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해석이 아니라 감상을 하려고 노력해본다. 이 모든 과정을 잘하지 못한 것 같더라도 그저 두어본다.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 하는 편이고 어릴 때 속독을 배워서인지, 급한 성격 때문인지 책 읽는 속도도 굉장히 빠른 편이다. 책 속 문장을 필사하기 위해 잠깐 일시 정지하는 순간은 있지만 금세 흐름을 되찾아 슥슥 읽어나간다. 그렇기에 시는 나의 책이 아니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어색하고 낯선 글이었다. 그러다 올해 초 첫서재에 갔을 때 이병률 시인의 눈사람 여관이라는 시집을 보았다. 그 당시에는 일상과 동떨어진 이런 좋은 공간에 왔는데 내가 안 볼 것 같은 책도 읽어야지 라는 생각을 했고 그 자리에서 시집을 '완독'하였다.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느끼기보다 읽었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독서였다. 그렇게 어설픈 첫 시집 읽기가 끝났다.


그러다 유튜브에서 시를 읽는 방법이라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나처럼 시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요령을 가르쳐주는 내용이었다. 미로를 헤매어도 보고, 반복되는 단어문장을 곱씹어도 보고 또, 한 권의 시집을 관통하는 무언가를 찾 보면 시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시집 뒤편에 있는 해석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그 해석이 본인과 안 맞을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우선 시를 읽고 싶어 졌다. 방법이 맞는지 혹은 나에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시를 읽고 싶어 졌다.


시집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작은 쉼터 같은 공간


운이 좋게도 근처에 시를 읽기에 좋은 카페가 있었다. '서정다방'이라는 곳인데 카페에 시집이 많고 장님이 시집 추천해주시는 곳이라고 예전부터 추천받은 카페였다. 여기라면 시를 읽을 수 있겠다, 이곳에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마가 곧 시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날, 서정다방을 찾았다. 사장님이 친절하게 먼저 말을 걸어주셨고 덕분에 시집을 추천해주실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었. 초심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지 않은 시,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시였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성윤석 시인의 '멍게'라는 시집을 추천받았다.


사장님께서 시인이 수산물 시장에서 일했었다는 배경을 말해주셨고 시의 제목이 문어, 멍게 등 수산물이어서 상상하읽으면 해석하기 쉬울 거라고 설명해주셨다. 시집 이름이 같은 제목의 시를 표제시라고 하는 데 먼저 읽으면 시집을 이해하기 쉬울 거라고 조언해주셨다. 그렇게 멍게 속 '멍게'를 찾아 읽었다.  번이고 읽었지만 머릿속에는 시인이 빨갛게 노을이 지는 시간에 수산물 시장 어딘가에 걸터앉아 건너편에 있는 멍게를 바라보는 모습만 상상되었다.


그날 여러 개의 시집을 추천받았지만 제일 마음에 남는 시집은 '멍게'였다.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바다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정을 느끼는 바다는 바다의 짠내와 철의 녹슨 냄새, 생선의 비린내가 섞인 항구가 있는 바다이다. 아버지가 어부도 아닌데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나도 의아하지만 어릴 때부터 맡은 고향의 내음 같다. 그래서인지 진한 남색의 슬픔이 울컥하 바다의 짠내가 느껴지는 멍게에 담긴 시들이 나에게 와닿았다.




빨리빨리 한국인인 나에게 천천히도 충분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시. 시를 읽으려면 우선 속도를 늦춰야 한다. 시는 해석이 아니라 감상이라고 하지만, 해석하기 위해서든 감상하기 위해서든 천천히 읽어나가야 한다. 평소에 책을 읽듯이 시를 읽면 무언가를 깨닫거나 느끼기도 전에 시는 이미 끝나버린다. 그러니 먼저 이 시를 썼을 때 시인이 봤을 풍경 혹은 시인의 마음 상태 등을 상상해본다. 한 문장, 한 문장 차근차근 읽어본다. 시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호흡한다. 문장이 바뀔 때, 단락이 바뀔 때 호흡 쉬어가며 이전 구절을 곱씹어본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시 읽어본다.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어가며 읽어본다.


내가 한 문장을 이렇게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나? 생각해보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한 땀 한 땀 읽어나가는 경험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굳이 종이에 필사하지 않아도 몇 번이나 눈으로 입으로 곱씹은 문장 마음에 적혔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제목의 시부터 혹은 그냥 펼쳐진 부분부터 읽어도 된다. 그렇게 읽다가 멈춰도 된다. 시를 읽는 건 해치워야 하는 과업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나에게 주어진 선택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강박처럼 순서를 고집했던 나에게 이 약간의 자유가 선물처럼 느껴졌다. 당분간은 좋은 시집을 만나고 싶어 안달 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사랑하는 작고 소중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