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미남 Apr 11. 2023

편의점에 간다는 것

  감기 14일 차.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서 1박 2일 동안 속세의 일반식으로 온기를 수혈받고, 어젯밤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자취방은 현실이다. 꿈에서 깨고 보니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는 부모님은 안 계신다. 다시 냉랭하고 작은 나의 현실. 잔기침은 여전했고, 왼쪽 눈에는 다래끼의 붉은 전조증상이 보였다.


  오늘 나의 하루를 돌이켜본다. 8시쯤 자연스럽게 눈이 떠짐. 8시 30분쯤 닭가슴살과 채소로 첫 번째 식사. 번듯한 사람처럼 보이고자 샤워를 마치고 병원 투어. 이비인후과와 안과에서 약을 받아와서 집에 도착하니 거의 11시. 세안 후 얼굴에 팩을 붙임. 어머니, 여자친구와 통화(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늘 기적 같은 일). 12시 40분쯤 ‘또’ 닭가슴살과 채소로 두 번째 식사. 집에 있는 책으로 독서. 4시 30분쯤 잠이 들어서 3시간 뒤에 기상. 19시 30분쯤 ‘다시 또’ 닭가슴살과 채소로 세 번째 식사.


  지난번 「간소한 식단의 즐거움」이라는 글에서 닭가슴살과 채소 등을 위주로 하는 심플한 식단을 예찬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보기 좋은 몸 상태를 유지하고 싶고, 활동이 적기 때문에 간소하게 먹는 게 합당하다는 생각. 그러나 매번 고민이 없는 루틴은 장기적으로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 ‘해마’가 작아지는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


  초록색 지식백과에 의하면, 해마는 관자엽의 안쪽에 위치하면서 변연계 한가운데 원호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학습과 기억에 관여하며 감정 행동 및 일부 운동을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중요한 부분. 얼마 전에 읽은 『궁금했어, 뇌과학』 108페이지를 보면,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 도파민을 비롯한 신경 전달 물질 몇 가지가 부족하고,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축소되어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 다른 초록색 포스팅을 보면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 해마의 부피가 적다고 한다. 해마에 손상을 입으면 어떤 기억도 장기 기억으로 바꿀 수 없게 된다고 하는데, 이 말은 곧 해마를 ‘의도적으로’ 건강하게 자극해줘야 할 필요성을 의미한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것. 늘 똑같은 식단이 정해져 있는 것. 변화가 적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뇌에 건강한 자극을 주는 일은 어렵다. 몸에 기운이 없고 기침을 한다는 것,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 아프면 푹 쉬어줘야 한다는 것. 여러 핑계로 나는 쳇바퀴 같은 나의 회색빛 일상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당장 무채색의 하루에다 높은 채도의 물감을 한 방울 떨어트려야 했다. 그래서 난 무작정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까지는 걸어서 5분. 하루 중 약 5분의 시간을 그토록 내기 힘들었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환자는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병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돌봐야 한다. 편의점에 들어가니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고민은 곧 수많은 자극들을 처리해야 함을 의미한다. 단백질 음료를 살 것인지, 요구르트를 살 것인지. 어떤 상품에 행사가 들어가고, 또 어떤 상품이 낮은 열량에 높은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는지 따위를 비교하는 행위. 일반봉투와 50L짜리 종량제 봉투 사이에서의 고민. 이 모든 것들이 뇌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결명자차와 단백질 음료 몇 개. 편의점에서 내가 구한 것은 단지 평범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내 뇌와 사고방식에 건강한 숨을 불어 넣어 내 일상을 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구원의 손길을 타인이나 신에게서가 아닌, 내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작가의 이전글 통화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