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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남 Feb 28. 2023

실직했습니다

  실직(失職). 직업을 잃음. 사전적 의미가 깔끔하다. 실직했다. 직업을 잃었다. 재계약을 원했던 내 의지와는 달리 일할 곳을 잃었다. 슬프지는 않다. 오히려 약간 설렌다.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 아니다. 지금 내 정신은 직장인일 때보다 더 또렷하다.


  교사로 1년간 일하던 학교에서 ‘기간제교사 최종면접에 불합격하셨습니다’라는 통보를 받고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새로운 학교’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이미 채용 시기가 한참 지났으므로, 최종적으로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학교는 4곳뿐이었다. 결과는 세 번의 1차 탈락과 한 번의 2차 탈락. 1년은 일해야 퇴직금을 받을 수 있으므로, 이미 이 기회는 물 건너갔다.


  낙담할 틈은 없었다. 다음으로 내가 한 일은 ‘2023년 최소 예상 지출 비용’을 계획하는 것. 월세비, 관리비, 공과금, 식비, 교통비, 통신비, 부조금, 고양이 관리비, 생필품 구매, 데이트 비용, 보험비 등등을 계산하여 어느 부분에서 지출을 줄일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그 결과 ‘실업급여’를 꼭 받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물론 학기 중에도 ‘한시적 기간제’라는 것을 구하는 학교가 있을 수도 있지만, 언제 공고가 뜰지 모르기 때문에 그때까지 모아둔 돈만 까먹어서는 금방 통장이 바닥을 보일 예정이다. 오늘까지 ‘계약 기간’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 날짜가 지난 뒤 다시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오라는 직원의 설명을 들었다. 일하던 학교 행정실에 전화해서 ‘상실신고서’와 ‘이직확인서’를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이번 주 목요일, 산뜻하게 차려입고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가면 된다.


  바디프로필 촬영을 포기했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상황에 바디프로필이라니. 사치다. 다행히 촬영 31일 전까지는 예약금을 100% 환불받을 수 있었다. 10만 원은 나에게 힘내라고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오늘 저녁엔 약 2달 만에 ‘불짜장’을 시켜 먹을 계획이다. 살다 보면 계획이 틀어진 덕분에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마치 불짜장처럼.


  생각해보면 약 5년 동안 쉴 새 없이 일해왔다. 남들은 일부러 연차를 내고 쉬기도 하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나 자신을 위해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 아닌가. 물론 매일같이 늘어져서 쉬지는 않겠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여유를 가지고 나 자신을 돌아볼 계획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도 볼 예정이다. 여자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오드리 헵번’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본 뒤 여자친구를 만나면 어떤 점이 가장 좋았는지를 나누고 싶다. 시간 많은 무직자의 특권이랄까.


  하루의 생활계획도 세워볼 생각이다. 어린 시절, 방학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우던 기분을 소환하여.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세상에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다. 내가 설령 백수가 되더라도 먹여 살리겠다는 고마운 여자친구님이 있다는 것. 노트북이 있다는 것. 집에 고양이님 두 마리께서 상주한다는 것. 사랑하는 가족이 건강하다는 것. 원하면 나에게 술을 얼마든 사줄 든든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자유로운 두 손이 있다는 것. 글을 볼 수 있는 건강한 시력을 가졌다는 것. 공기청정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청력이 좋다는 것. 아직 방에 남아 있는 카레 향을 맡을 정도로 후각이 좋다는 것. 이따 먹을 불짜장의 매운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미각을 갖고 있다는 것. 창문을 통해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촉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시간은 금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직업을 잃은 대신 무수히 많은 ‘금’을 얻게 되었다. 오늘부터 나의 하루하루가 설렘으로 가득 찰 예정이다. ‘무직’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일정한 직업이 없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 나의 새 출발, 축하하고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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