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센스 있는 시그널이 'yes'라는 답변을 이끌어 낸다!
"좋아요~!"
"여기 뒤에 산책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가 보실래요?"
"음~ 좋으네요!"
"좀 덥죠?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음... 그런데, 원래 이 길은 손 잡고 걷는 길이에요."
"ㅎㅎ 그래요? 자~!"
"자기야(사귀기 시작하면서 그와 나는 호칭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 지금 집 앞인데, 잠깐 나올래?"
"자기야, 나 지금 나가기 힘든데, 엄마, 아빠도 다 계시고... 다른 날 보면 안 될까?"
"아.. 그래? 잠깐만 보면 안 돼? 나, 얼굴만 보고 금방 갈게."
"어... 미안. 나 오늘은 좀 그래. 몸도 좀 안 좋고... 미안."
"알았어! 내가 너무 눈치 없이 이 밤에 찾아왔지? 몸도 안 좋은데, 잘 쉬고, 주말에 보자!"
애써 밝은 목소리로 답을 하고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결혼하고 나서 안 사실이었지만, 그날 밤 그는 '수미칩'을 주기 위해 그 밤에 달려온 것이었다.
"전 수미칩 좋아해요! 허니버터칩보다 구하기는 더 쉽고, 맛도 좀 더 있는 것 같더라고요"
당시는 허니버터칩이 매우 인기였던 시절(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이었는데, 한번 먹어보니 너무나 얇고, 질소로 가득 차 있어 비슷한 맛의 수미칩이 더 좋다고 했던 말을 기억했던 모양이다. 연애 초기, 나와의 연애가 그렇게도 좋았는지 낮에 본 여친을 보기 위해 '그녀가 좋아한다던 수미칩'을 사들고 밤에 여친집으로 향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하지만, 수미칩을 핑계로 얼굴 한번 보려던 구남친의 계획은 한방에 무산됐다. 갑자기 집 앞으로 찾아온 남친을 활짝 웃으며 반겨줄 거라는 상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결혼하고 나서야 알게 된 이 가슴 아픈 사연은, 먼 훗날 내가 남편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길 하겠지만, 이 '수미칩 사건'은 의도치 않게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게 만드는 '당멈(밀고 당기는 것이 아니라 당기고 멈추는 것: 연애 잘하는 사람들의 연애 비법은 바로 당멈이었다. 나도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비결이다) 비법'이 됐다.
'수미칩 사건' 이후, 배려 잘하는 나의 구남친의 배려는 한층 더해졌고, 말과 행동은 더욱 따뜻하고 포근해졌다.
"자기야, 잘 잤어?"
"응! 잘 잤어. 자기는?"
"잘 잤지! 난 자기 생각하면서 잘 잤어~!"
"ㅎㅎㅎ 정말? 그럼 오늘 하루도 일하면서 내 생각하는 거 잊지 말아요!"
"어, 당연하지! 난 항상 자기 생각만 해!"
뭐 오글거리지만, 우리의 실제 대화는 이러했다. 햇수로 5년 차, 결혼 만 4년 차가 되는 우리의 대화는 아직도 비슷하다. 마을버스를 타면 '버스 탔어요!', 내려서 대기줄에 도착하면 '대기줄 도착이요!', 셔틀버스를 타면 '버스 탔어요! 여보 오늘도 무리하지 말고 잘 보내고 저녁때 보자~!'라는 톡을 보내온다. 11시 20분이 되면 어김없이 '맛점 해요'라는 톡이 오고,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밥은 챙겨 먹었어?'라며 또 한 번 안부를 물어 온다. 퇴근할 땐 '퇴근이요'라며 이모티콘도 잔뜩 보낸다. 연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변함이 없다. 매일 내가 그를 조금씩 더 사랑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다시 우리가 연애를 시작하던 당시로 돌아가 보자. 그 와중에도 나에게는 끊임없이 소개팅 제안이 들어왔다. "저, 남친생겼어요!!!"라고 굳이 광고하지 않았고, 굳이 할 필요도 없었기에(30대 중후반 싱글들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핫한 가십거리가 된다) 알리지 않았다. 고로, 당시 여전히 내가 싱글족일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소개팅 제안을 해왔고, 그때마다 나의 마음은 갈대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야, 나 소개팅 들어왔어! 해 볼까 해!"
"언니, 미쳤어? 그러다 그 오빠 알면?"
"야, 당근 모르지! 내가 다 모르게 하지. 나는 시간이 없고,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소개팅만 한 번 해보는 건데, 그게 뭐 어때서!"
"어휴... 언니.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그러다 좋은 사람 놓쳐. 내가 보기에 그 오빠, 사람 괜찮아 보이는데. 나라면 안 해."
계집애, 짤 없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나는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겼고, 그리고 걍, 한번 만나만 보겠다는 건데... 안될 이유가 없잖아! 잠시 모습을 감췄던 '철딱서니 철벽녀'가 또 등장했다. 아빠를 제외한 동생과 엄마에게 '뉴남친' 사진을 보여줬더랬다.
"됐다! 얘랑 (결혼)해라! 눈이 아주 반짝반짝한 게, 앞으로 ooo 사장까진 하겠다, 눈빛 보니!"
나보다 더 눈이 높으면 높았지, 절대 나이에 맞춰 시집보낼 생각이 없는 우리 엄마가 구남친의 사진을 보고 한 첫마디였다.
'헐... 눈이 이렇게 작은데 눈빛이 보여?? 울 엄마 의외네...'
아빠를 제외한 내 동생과 엄마는 그 당시 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 그를 만나면서 소개팅을 또 하겠다고 하니 아주 잔소리와 비난이 빗발쳤다.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뭐 더 좋은 사람이 나올 수도 있잖아...'
그땐 아주 못되게 남친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볼 생각을 했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그리고 늘 항상 마음을 쓸어내린다. 이 남자를 놓쳤으면 어쩔 뻔했나...
나의 이기적인 행동에도 떠나지 않아 준 나의 구남친과, 나의 철없는 행동을 따끔하게 꾸짖어준 울 엄마와 내 동생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아직 영원한 반쪽을 찾지 못했거나, 누가 진짜 나의 반쪽인지 헷갈리는 세상의 모든 미혼남녀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큰 키, 빼어난 외모, 지나가다 한번 더 쳐다볼 것 같은 스타일링, 높은 연봉, 외제차, '사'자가 들어가는 전문직, 내로라하는 경제력보다 중요한 건, 나와 연인이 된 후로도, 나의 반려자가 된 후로도 그 진정성이 변함이 없을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크리스천 친구들이 '배우자 기도'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평생 함께할 인연'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빌었다. 누군가 우리 곁에 운명처럼 찾아오는 그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 그 인연을 놓치지 않도록 '오롯이 알아차리는 눈'을 길렀으면 한다. 그것이 어쩌면 나에게는 수많은 소개팅이었을 수도 있고, 수많은 썸이었을 수도 있고, 엄마와 동생의 날카로운 지적이었을 수도 있다. 흔들리는 마음과 관계에 너무나 힘들어하고 있다면, "쟨 절대 아냐!"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아... 쟨 진짜 노답이야, 정말 답답해!"라는 사람도 다시 한번 더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듬어지지 않아서이지, 다이아몬드를 품은 나의 평생 인연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