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결혼까진 생각지도 않았던 그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했다!
나는 PD다. 무릇 PD는 현장 상황을 빠르게 파악해 전 스태프들이 흔들림 없이 촬영, 취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하거늘, 스물네 살 어린 여자 PD에게 이러한 역할은 너무나 가혹했다. 여성스러운 것도, 목소리가 작은 것도, 거칠지 않은 것도 여자 PD에게는 늘 마이너스였다. 그 당시엔 그랬다.
"자, 다음 현장음 있습니다. 오디오 잘 들리게 살려 주세요, 자~ 스탠바이, 스타트!"
종편(종합편집: 방송의 가장 마지막 단계로 오디오 최종 믹싱과 영상 색을 잡는 방송의 최종 마스터 단계)을 가는 건 또 왜 그렇게나 부끄러운지, 모기만 한 소리가 목 안에서 앵앵 맴돌다 결국 NG가 난다. 그러면 근속연수 20년은 족히 차이나는 선배들이 "야, 남 PD! 사인 똑바로 안 줘? 제대로 안 하지?" 라며 도끼눈을 뜨고 쳐다본다. 그럼 또 기가 푹 죽어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하며 이를 악물었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그렇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넉살도 좋아져야 했고, 대 센 카메라 선배들도 잘 다뤄야 했고, 수십 년 차 엔지니어 선배들의 '곤조'에도 기죽지도 않아야 했다. 이런 생활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정작 내 인생의 매우 중요한 반쪽을 찾는 소개팅에서는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종의 직업병, '인터뷰 병'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
"언니, 나 왜 이렇게 소개팅만 가면 말을 많이 하게 되지? 하... 뭔가 '마가 뜨는 걸(방송 용어로, 소리와 소리 사이에 아무런 현장음이나 내레이션 없이 소리가 없는 순간을 '마가 뜬다'라고 한다)' 참을 수가 없어..."
"아씨... 나도..."
"아무래도... 직업병인 거 같아."
우린 그 자리에 섭외를 하러 간 것도, 인터뷰를 하러 간 것도 아닌데, 늘 소개팅이 끝나면 인터뷰를 하고 섭외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애프터는 왔지만 상대방은 나를 '센 언니'처럼 느끼는 듯했다.
'아... 이게 아닌데...'
늘 소개팅이 끝나면 찝찝한 마음을 가실 수가 없었다. '오늘도 섭외 성공!' 이런 느낌? 나와 찰떡인 인연을 만나 연애를 하고, 그러다 또 좋으면 나의 인생을 함께 공유할 사람을 만나러 간 것인데, 왠지 촬영하고 인터뷰 하나 끝내고 온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은 늘 나에게 슬픈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서른이 넘어서면서부터 소개팅 전략을 바꾸기에 이른다. 절대 쉽지 않은 과정이자 트레이닝 과정이었다.
일단, 말을 줄였다. '주거니, 받거니'가 삶인 나에게 내 이야기할 시간은 대폭 줄였다. 대신 '장단 맞추기'로 전략을 바꿨다. 내 이야기는 '오늘의 그'와 커플이 되면 충분히 많아질 것이다. 오늘 나에게 중요한 건, 정해진 시간 안에 나의 장점을 최상의 상태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고, 생긋생긋 웃으며 상대의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포인트를 찾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둘째, 나의 긍정적인 성격을 살려 '아, 그래요? 재밌겠다', '우와! 좋은데요?', '꺄~ 여기 너무 좋아요! 이런 덴 어떻게 아셨어요?' 등 상대가 애쓴 부분을 칭찬해주고, 공감해 주기에 주력했다. 처음 만난 상대일수록 이런 칭찬은 중요하다(특히 남자의 경우 칭찬에 매우 약하다).
셋째, 철벽녀 근성을 싹 버리기로 했다. 한번 만나서 '이 사람 NO!'라는 건 정말이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다. 그 사람이 소개팅에 특화돼 모든 이성의 감성을 한 번에 사로잡는 '프로 소개팅어' 보다는 약간 소박하고, 약간 서툴러도 '다이아몬드를 품은 진국'이 훨씬 더 알짜배기일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소개팅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약간의 부작용을 연출할 수도 있다. 나의 구남친님은 내가 편안했던 건지, '안물안궁', 물어보지도 않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두 번째 만남부터 자기 이야길 꺼내 놓기 시작하는데,
'어머, 이런 얘기 왜 나한테 함? 안 물어봤는데? 헐... 부담...'
옛날 같았으면 애초에 그날의 만남을 끝으로 그의 톡을 '읽씹'했거나,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넘겼을 것이나, 일단 두세 번은 더 만나볼 예정이었으므로 걍 참기로 했다. 그러던 중, '어라? 이 남자... 좀 괜찮은... 것 같다?' 하는 두 개의 사건이 발생한다.
"오빠,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요?"
"나? 그냥... 내가 원래 사람한테 막 살갑게 잘하는 스타일은 아냐."
나는 사귀는 사람들에게 항상 같은 질문을 해왔다. 과연 구남친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자기야,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
"그냥~! 내가 자기를 챙겨줄 수 있다는 게 좋아. 자기를 챙겨주는 그 느낌이!"
뭐 이렇게 괜찮아, 사람이..! 사실 그날 좀 감동했다. 쪼꼼 많이. 같은 질문에 어찌 이리도 차원이 다른 답변이 나오는지!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그를 볼 때마다 '이 남자 참, 남편감으로 괜찮다!'라고 생각하게 된 게... 그러고 보니, 구남친이 나를 만날 때마다 보여줬던 행동이 하나, 둘 떠올랐다.
"자기야,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잠깐 어디 주차 좀 할 수 있어요?"
"어, 그래? 잠깐만! 여기로 가자! 여기가 깨끗하고 안전할 것 같다."
어느 날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한 뷔페식당엘 가게 됐는데, 그의 행동은 또 나에게 '결혼 이후 삶'에 대해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거 먹을래?"
"이것도 먹어 봐, 맛있어 보인다."
가만 보니 나는 접시만 들고 서 있고, 구남친은 요목조목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정갈하게 내 접시에 놓아주었다. 나는 마치 공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 남자랑 결혼하는 여잔 참 좋겠다..!' 하는 생각에 서서히 빠져들게 됐다. 지금도 나의 구남친이자 자상한 남편은 음식이 나오면 먼저 먹어보라며 숟가락을 쥐어 주고, 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할 때 그 화장실이 깨끗한지, 안전한 지를 확인하고 데려간다. 어쩔 수 없이 외진 화장실에 가야 할 경우, "안에 아무도 없는지 봐봐" 하며 문 앞에서 보초를 선다. 완전 든든해~! 이쯤에서 밝혀 보자면, 연애 때부터 써오던 우리 부부의 닉네임 '꽁든커플', '꽁든부부'는 '맹꽁이'와 '든든이'의 앞글자를 따 만든 것이다. 그는 나를 '으이그~ 이 맹꽁아~'라고 부르고, 나는 그를 '내남자 든든이'라고 불렀다. 똑 부러질 것 같은 외모지만 허당기 가득한 나의 모습을 '맹꽁맹꽁' 귀엽게 봤던 남치니와, 뭐든 한번 보면 기억하고 척척 해결해 주는 추진력에 반한 내가 서로에게 붙여준 애칭이었다. 지금도 내 폰엔 남푠 대신 '♡내남자 든든이♡'라는 이름으로 번호가 저장돼 있다.
그렇게 '내남자 든든이'가 조금씩 더 좋아질 무렵, 나에게는 고민 하나가 있었다.
'아... 든든하긴 한데, 외모가 너무 아기 같아...'
나도 '한 동안'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외모는 너무나 어려 보였던 것.
'이래서 뽀뽀나 제대로 하겠나...'
든든하긴 했지만, '초특급 베이비 페이스'를 자랑하는 남친이의 외모를 보며 솔직히 이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우리 결혼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고, '뽀뽀 걱정'은 나의 괜한 기우였음을 느끼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