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순간의 용기가 판도를 바꾸기도 한다!
그랬다. 그 무렵 나는 결혼에 대한 압박과 난무하는 소개팅과 썸들을 정리하지 못해 혼란기를 겪고 있었고, 그랬으면서도 소개팅 욕심은 버리지 못해 점점 더 '영양가 없는' 썸남들만 많이 생성해 내고 있었다. 그땐 왜 그렇게도 소개팅 욕심은 많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았는지... 아주 철딱서니라곤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30대 중후반의 여자였다. 시간을 되돌려 나의 젊었던, 그 풋풋했던 시절을 돌아보면 이러했다. 부끄럽게도 그땐 나만 그런 줄 알았지만, 보통 다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10대: 가만히 있어도 반에 한 두 명 정도는 심각하게 장난을 걸며 관심을 표하는 남자아이들이 있다. 그러다 초딩 고학년이 되면 각종 편지와 카드에 '사랑해'라는 단어를 섞어 쓰며 어른 흉내를 내기도 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세 글자는 콩알만 한 초딩 여자 아이를 우쭐대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 좋아하는 남자애들 많아!'
20대: 일단 입학 전, OT에서 새내기의 인기는 성패가 난다. 너무 나서서도, 너무 조용해서도 안 되는 중도를 유지하면서, 다가오는 선배들과 동기들의 관심(꼭 그 여자가 예쁘거나 빼어난 몸매여서 대시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에 적절히 공감해야 한다. 친절하고 착한 새내기의 풋풋함으로 생글생글 웃기만 해도 선배들은 '잘한다, 잘한다', '이쁘다, 이쁘다' 하며 칭찬 세례를 퍼부어 주는데, 이 또한 '어우, 왜 다들 이렇게 잘해주시지~'라며 '내가 좀 괜찮은가?'라는 '심각한 착각의 늪'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심하게도 그 당시, 주변 '남사친'들이 나에게 관심 있다 오해하며 그들의 관심과 배려를 즐기며 살았더랬다. 이때부터 몹쓸 콧대가 높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30대: 20대에 비해 소개팅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당연히 친구의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나, 취재에서 연인으로 골인되는 가능성도 점점 더 떨어진다. 그렇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다 보니, 소개팅 기회가 많았고, 그때마다 '당연하지이!'를 외치며 주말마다 소개팅을 해왔다. 자고로 소개팅이란 외로운 솔로들이 만나 커플이 되기 위함이니, 아주 나쁘지 않으면 보통은 썸 단계로 넘어간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썸이 장기전에 들어갈 경우,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즐기는 류와 이런 과정을 초반에 정리하는 류로 나뉘는데, 나는 보통 전자였다. 왜냐? 주말에 집콕을 싫어했고, 놀면 뭐해~ 사람 만나고 놀지! 더 심각한 건,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인기놀이' 따위를 하며 울 엄마, 아빠 속을 푹푹 태우는 '30대 공주'가 돼 가고 있었다는 것.
이랬다, 이랬어. 이런 삶을 근 37년을 살아오면서 '마음만 먹으면 연애고, 결혼이고 후딱 할 수 있어!'라는, 말도 안 되는 자만심에 빠져 살았다(다 지나고 나서 보니, 서른셋에 '이제 결혼이라는 걸 좀 해 볼까?' 마음먹었지만 정작 결혼은 서른일곱이 돼서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썸만 난무하는 경우, 이 상황을 즐기고만 있어서는 답이 없다. 왜 이성이 나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여기서 한번, 저기서 한번 대시만 하다 이도 저도 아닌 사이로 잔류하는 것일까? 첫 번째, 내가 사귀거나 결혼을 하고 싶을 만큼 매력 있지 않기 때문! 두 번째, 내가 너무 철벽을 쌓고 있거나 다른 이성들이 많아 보여 더 이상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 세 번째, '세상 최고의 조건'을 정해 놓고 그 조건에 맞지 않으면 단칼에 베어 버리는 '몹쓸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런 경우 썸만 많고 내실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던 딸을 보는 우리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꼬! 나만 빼고 다 알았다. 그닥~ 매력적이지도 않으면서, 그 나이에 맞지 않게 고고한 학처럼 철벽을 쌓아, 왕실에서 들이댈 법한 조건을 '남편감 자격 요건'으로 걸고 있었으니... (나 참 한심했다...)
뭐 암튼 그러했는데, 그래서 썸남이 꽤 많았던 터였다. '누난 나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야 해'라며 '누난 내 여자니까' 코프스레를 하는 여섯 살 연하남, 의사 집안 둘째 아들로서 공기업에 근무하는 매우 안정적인 두 살 연상남, 그리고 소개팅에서 만난 운동하는 네 살 연하 유럽 남, 업무로 만났지만 매우 훤칠하고 옷 잘 입는 네 살 연하남. 그리고 여기에, 가장 평범한 나의 구남친 님까지. 각자 알고 지낸 시기는 다 달랐지만 꽤나 다양하고, 괜찮은 조건을 갖춘 썸남들이었다.
그러다 한 번은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다. 꼬리가 밟힐 뻔 한 사건이 있었는데, 사실 아무도 사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양다리는 아니다... 한 번은 그 소개팅, 그러니까 나의 구남친이자 현 남편인 그 남자가 회사 앞으로 픽업을 온 적이 있었는데, 일종의 서프라이즈였다.
"끝났어요?"
"아, 네! 오늘 좀 일찍 끝나서~ 지금 퇴근하려고요!"
"아, 네! 알겠어요!"
그날 난 썸남과 저녁을 먹고 집으로 가기로 돼 있었는데, 이 구남자 친구(오해 금지! 그 당시엔 구남친이 되기 전이었다) 님이 '서프라이즈!' 하며 회사로 데리러 온 것! 까딱 잘못했으면 썸남과 회사 앞에서 두 대의 차로 만날 뻔!
"저, 지금 회사 앞에 와 있어요! 오늘 같이 퇴근해요!"
"네??? 아....... 저요, 저 지금, 버스 탔어요! 미안해요...(썸남이 길을 잘못 알아서 회사 바로 앞이 아닌 다른 곳에 정차를 했었더랬다. 심장 떨어질 뻔!)"
"아............ 정말이요? 그렇게나 빨리요? 그럼 다음 정류장에 내려요~! 같이 가요~!"
"죄송한데... 저 이미 많이 와서... 오늘은 피곤해서 혼자 갈게요....."
으찌나 미안하던지... 지나고 나서지만, 나의 착하디 착한 구남친은 '마상'으로 '내가 오버했나 보다!'라며 마음을 접을까도 생각했다고. 그때 포기했으면 어쩔 뻔했는지... 난 아직도 솔로일지 모른다. 이 좋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또 놓치고 후회할 뻔했던 것 아니겠어? '공주놀이'를 즐기던 나에게 일단 담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마지막 소개팅남, 구남친은 세 번째 만나는 날 이런 말을 했다.
"음... 나는 남PD님을 결혼을 전제로 만나 보고 싶어요. 오늘부터 정식으로 사귀고 싶어요. 대답... 해 줄 수 있어요?"
오! 마이! 갓!
만난 지 삼일 만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남자, 너무 낯설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끌린다. 요즘 남자들, 자존심도 세고, 거절당하기도 싫어해서 '사귀자'라고 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오늘부터 1일!'을 외치며 답해 달라는 이 남자에게 자석같은 이끌림이 있었다.
'나, 지금 고민하고 있니?'
너무 대놓고 물어보셔서 선뜻 답을 못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보석 같은' 썸남들을 잃고 싶지 않았고, 당장 정리할 용기도 없었고, 또, 또... 좀 더 알아보고, 누구 하나랑 사귀어야 하는데... 아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사귄다고 할까? 그리고 틈틈이 좀 더 만나보면서 다른 사람들 정리하면... 안될까?'
아냐, 아냐. 그건 양다리, 삼다리, 사다리잖아. 썸이랑 사귀는 건 다르잖아. 그럼 안 되는 거잖아. 'yes'라고 대답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왔고, 그는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조명이 아주 예뻤던 교외 한 한옥카페에서 잠깐의 고민, 지금까지 나의 실수와 과거들이 뇌리를 스쳤다.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넌 아직 정신 차리려면 멀었어. oo이도 괜찮았고, 그 누구냐, 의사 걔도 괜찮았고, 그 ooo 기자도 괜찮았고, oo도 괜찮았어! 너 좋다는 애들 다 뿌리치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너 잘 생각해 봐. 지금 네가 그럴 땐 지!"
맞아. 다 괜찮았었지. 다 착했고, 자상했고, 배려했고, 만약 그중 하나와 결혼했더래도 우리 가족들과 잘 어울릴 것 같았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생각... 해봤어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