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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ug 13. 2019

시와 마술, 그리고 환상에 대해


시를 잘 쓰고 싶던 적이 있다. 그때는 시가 하고 싶은 말을 가장 멋지게 전달할 수 있는 문학이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시를 찾아 읽고 필사 노트를 만들어 쓰면서 일상의 새로운 기쁨을 느꼈다. 시는 속엣말 같았다. 귀 기울이면 마음 어딘가에 숨은 빗장 하나가 풀려서 진언을 혼자만 알게 된 기분이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지만 시는 애초에 기대하는 무엇 하나도 들어맞지 않아서 스무고개를 하듯 시어와 시구 사이를 넘나들게 된다. 몇 번을 읽어도 어렵게 느껴지고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시도 있다. 그럴 때 시가 오래 알아도 훤히 볼 수 없는 사람의 속마음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더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읽겠다는 마음만 남겨두고 잠시 책을 덮으면 그만이었다.    

지적 허영심이 높아질수록 점점 시와 멀어졌다.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소설이라던가 가볍게 읽기 좋은 산문집, 화제의 책, 누군가 추천하는 책, 내게 필요한 책 등 항상 먼저 읽어야 할 책들이 넘쳤다. 시를 읽지 않아도 세상은 바쁘게 돌아갔다. 사실 쳇바퀴를 굴리는 사람은 나였다. 내 쪽에서 관심을 갖지 않아 근황을 알 수 없게 된 사람처럼 시도 금방 잊혔다.

 

김소연 시인의 <나를 뺀 세상의 전부>라는 산문집을 읽었다. 그중 시인이 서점에서 ‘일일 시집 구매 상담소’를 차려 독자에게 시를 추천해 준 경험을 읽으며 시를 대하는 마음을 생각했다. 시인의 시보다 산문집을 먼저 선택한 내게도 자극이 되는 글귀였다. 서점에 와서 시집을 고르고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려는 독자들을 본 시인은 이렇게 적는다.



독자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적혀 있는 시집을 찾아 헤맨다. 꼭 듣고 싶은 한마디가 시에 적혀 있기를 바란다. 이 시대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사랑한다는 말도, 희망이 있다는 말도, 인간을 믿어보자는 말도,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는 말도 뻔히 거짓말인 줄 다 아는 시대다. 어쩌면 뻔한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번 고려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시가 다시 읽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사람을 믿어보겠다며 다른 방식으로 고백해보고 싶어서 시집을 선물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를 뺀 세상의 전부」  중에서                      

                                                                                                                               

원하는 말과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에 시집을 고르는 이들을 보며 시인이 발견한 건 가능성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이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쓴 속내는 시를 통해 사람들이 저마다 찾고 있는 마음의 무늬를 발견하길 바라는 것 같다. 다 똑같아 보이는 클로버 사이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면 수많은 세 잎 클로버를 두 눈 크게 뜨고 바라봐야 한다. 그동안 눈을 뜨고 다시 한번 믿어보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않아서 시를 읽지 않는 건 아닐까. 비단 시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사람도, 호기심을 갖고는 있지만 경험하지 않고 단정 짓는 모든 대상도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 <매직 인 더 문라이트>는 살아온 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1920년대 유럽에서 극찬을 받는 중국인 마술사로 나오는 웨이링수(콜린 퍼스)는 원래 스탠리라는 이름의 영국 사람이다. 마술의 세계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지만 실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하지 않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현실주의자이다. 사람들에게는 마술의 환상을 심어주면서도 현실은 전혀 딴판인 주인공이 동료의 장난으로 심령술사인 소피(엠마 스톤)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스탠리는 가짜 심령술을 펼치는 소피의 속임수를 찾으려 하고 소피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삶에는 환상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스탠리는 자신처럼 교양 있고 배운 사람의 격식에 어울리는 약혼자가 있다. 소피와 친구의 거짓말에 속은 걸 안 스탠리는 “나의 낙천주의는 환상이었죠”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거짓을 들추려고 만난 소피의 아름다운 눈망울에 비이성적인 영역이 작동한다. 그는 사랑에 빠진 마음을 이모에게 고백한다. “절대 풀 수 없는 속임수를 보는 느낌이에요”라고. 그리고 그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이모는 말한다.


 “이 세상이 신의 의도든 아니든 어떤 마법이 존재하는 건 분명해.”

마술을 볼 때도 그렇지 않은가. 마술을 보는 순간에는 현혹되는 즐거움에 빠진다. 그것이 얄팍한 눈속임 문법이라 할지라도 신비롭다. 마술의 매력은 그 자체에 있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에서 보여주듯 사랑이 처음부터 이성적으로 잘 맞는 사람들의 만남이라면 고리타분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인연이 엮이는 데서 ‘어떤 마법’이 일어나길 원한다. 그래서 소위 막장 드라마에서는 출생의 비밀, 원수 집안, 재력과 신분이라는 설정을 최대치로 두고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들을 생산한다. 시를 읽거나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도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모험 없이는 불가능하다. 책을 읽고 또 다른 책을 고르는 나도 늘 모험을 하고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한 문장을 만나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무모하고도 유용한 믿음은 직접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그네를 탈 때, 발과 온몸으로 공기를 가르며 몸이 높이 떠오르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느끼는 찰나에 바람이 나를 끌어올려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유치하지만 그런 상상의 조각들이 유년의 행복이었다. 다시 한 번, 환상, 모험은 가능성의 또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책이 있고 사랑 이야기가 있지만 나는 그걸 계속 찾고 있고, 여전히 어떤 환상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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