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NI Jul 29. 2019

부끄러움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지만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음식점에서 인터뷰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맛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부분 ‘~인 것 같아요’라는 종결형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다. “양념 때문에 고기가 더 부드럽고 맛있는 것 같아요”.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라는 식이다. 음식을 보느라 정신이 팔리다가도 그런 표현을 들으면 잠시 멈칫한다. 맛에 대한 느낌 정도는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도 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심지어 뉴스에서 기자가 나들이를 간 가족들에게 기분을 물었더니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즐거운 것 같아요”라고 맺었다. 이 정도면 느낌을 표현하는 답에 문법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만 답답한 걸까. 물론 나는 인터뷰조차도 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부끄러워서 그렇다. 생각과 느낌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부모의 말,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말, 사회에 나와서는 선배와 윗사람의 말, 결혼 후에는 나보다 먼저 가정을 이룬 어른들의 말에 모나지 않으려고 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걸 바꾸려는 시도조차도 과감히 해보지 못한 채. 그냥 나다움을 조금씩 죽이면서 사는 게 둥글게 지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솔직하면 되바라진 사람이 되고, 감추면 앙큼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불안을 겪기도 했다. 지금도 모두 과거의 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적당히 감추고 드러낼 줄 아는 표준형의 모습이 필요했다. 내가 나답지 못할 때를 여실히 드러내는 건 부끄러움이었다. 그것만큼은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체에 곱게 걸러내도 미처 거르지 못한 찌꺼기처럼 말이다. 체에 걸러지지 않은 그것도 결국 원재료와 다를 바는 없지만.

얼마 전 음악 축제에 갔다. 남편의 일로 따라간 거라 나만 자유로운 상황이었다. 기왕 온 거 혼자 신나게 놀아보자는 마음으로 한 손에 맥주를 들고 팝업 행사장에서 타투 스티커도 붙였다. 공연이 열리는 스테이지로 걸어가던 중 흥에 겨워 춤을 추는 사람들, 걷고 마시다가도 갑자기 머리를 흔드는 사람들, 평소라면 입지 않을 과감한 노출을 한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스테이지에서 중간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음악이 마음대로 뒤척여도 되는 이불인 양 자유자재로 흔들었다. 나도 신이 나서 춤을 췄는데 관절 인형처럼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누가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어색했다.    


계속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빡빡 깎은 머리에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가방을 옆으로 바짝 맨 남자는 한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혼자 온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독특해 보였는지 몇몇 사람은 그를 촬영했다. 팔다리를 크게 흔드는 사람들과 달리 눈을 꼭 감고 음악의 비트보다 반 박자씩 느리게 움직였다. 목과 어깨가 가늘게 흔들리는 걸 빼면 어정쩡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음악에 몰두하는 듯하다가 사라졌는데 나중에 보니 잔디밭에서 큰 대자로 누워서 쉬다가 다시 와서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즐기는 모습이 부러웠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논할 수가 없다.


몇 해 전 여름휴가로 간 뮌헨에서 영국정원을 걷다가 잔디밭에서 브라를 벗고 하늘을 향해 누운 여자들을 보게 되었다. 그녀들은 구석진 곳도 아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잔디밭에서 편안하게 눈까지 감고 있었다. 옆을 지나던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보이는데도 못 본 척하면서 지나가려고 애를 썼다.



문화 충격은 둘째치고 한편으로는 사람의 몸을 본 일인데 그리 놀랄 일인가 싶었다. 솔직히 브라를 벗어던진 여자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런데 나는 아름다움을 느끼면서도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사람처럼 굴었다. 아무래도 노출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바뀌었던 과거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다가 몰카에 찍힌 일도 있었고, 모르고 바지 앞지퍼를 열고 버스 맨 앞자리에 탔던 적도 있다. 그때 운전기사는 수시로 뒤를 돌면서 나와 내 여대문을 번갈아가며 관찰했다. 그 더러운 미소가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노출은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넘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낳았다.  


한번은 헬스장에서 샤워를 했는데 브래지어를 안 챙겨 와서 노브라로 나온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땀에 절은 브라탑을 입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집까지 걸어가는 10분이 너무 찜찜하고 불안했다. 등이 굽은 사람처럼 온몸을 숙이고 운동 가방으로 앞을 가리면서 걸었다. 그리고 집에 다 와서야 뻣뻣해진 목과 어깨를 펴며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부끄러운 걸까.



성장 과정과 내•외적인 갈등, 사회적 시선과 본질적인 나 사이에서 일종의 가면을 쓸 때가 있다. 어쩌면 평생 벗지 못할 가면일 수도 있다. 적당히 드러내다가 나를 간파한 것 같은 상황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얼굴이 빨개진 일, 나도 모르게 사회적으로 학습이 되어 터부시 해버린 일들, 감추는 게 더 익숙해서 스스로 자유로워지지 못한 모습. 그로 인해 마음을 더 가까이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여러 상황이 떠올랐다. 가면 안에 숨겨온 많은 모습 중에서 부끄러움이란 단어가 떠올라 노트에 에피소드를 적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피상적인 부끄러움에 머물러 있었다. 부끄러움에도 수준이 있다면 나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윤동주의 시처럼 부끄러움이 자신과 세상을 향한 절규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이제 막 그 단어의 껍질을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껍질을 조금씩 까 보니 결국 ‘정말 부끄러운 게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