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부르고
이름은 낯설면서도 항상 궁금한 이면을 가졌다고 생각해왔다. 가령 병원에서 기다림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진료실 옆 작은 화면으로 대기 중인 사람들의 이름을 본다. 재미있는 이름도 있고, 생소한 이름도 있다. 한참 나와 다른 사람의 이름을 곰곰이 살피다 보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호명되어 일어나는 사람과 내가 상상한 이미지를 엮어보기도 한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다. 그러다가 내 이름이 불리면 그렇게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다.
나는 이름이 늘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낙서가 좋았던 십 대에는 빈 종이에 이름을 몇십 번이고 적곤 했다. 어른이 되면 사인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친구들과 호기롭게 흘려 쓰는 연습을 할 때도 어색한 기운을 떨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첫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첫 해외여행을 떠나고, 관공서에 가는 등 수많은 이름을 쓰고 말해왔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이름에 익숙해지는데 역할을 한 건 아니다. 이미 정해진 이름은 하루아침에 예기치 않은 배역을 받은 것처럼 갑작스러웠다. 신경 쓰지 않으면 불편한 옷은 아니지만 나에게 딱 맞지도 않는 옷 같았다.
'나 스스로 위르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나는 어떤 이름을 갖고 있었던가? 그 이름 역시 지어낸 정체성이 아니었나? 분명코 그랬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라지만 그래도 지어낸 것임은 틀림없었다. 그렇듯 남이 지어준 이름을 갖고 살 때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은 그 주어진 정체성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마련이다.' 「제비 일기」 중
「제비 일기」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살인청부업자로 살 때는 '도시인'이라는 뜻이 담긴 '위르뱅'을, 살인을 하러 갔다가 한 소녀의 마지막 눈동자를 본 후로는 '죄 없는 자'라는 뜻의 '이노상'이란 이름을 짓는다. 이전 이름의 묵은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이름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자신의 삶의 자세에 맞게 이름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주인공의 모습은 잠시 자유로워 보인다. 스스로 당위성을 갖고 만든 이름이라 한들 새로운 이름이 생기는 순간 새겨지는 정체성의 그늘에서 언제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름을 바꾼 게 반쪽짜리 자유와 정체성으로 보이는 건 관계가 배제된 개인의 의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르는 입모양은 예쁘다. 이유를 불문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과 입의 모양은 온전히 그 사람을 향해있다. 살아온 나날에 부모님이 나를 부른 이름의 횟수는 헤아릴 수 없다. 헤어질 때 아쉬움에 한 번 더 이름을 부르며 잘 가라고 인사한다. 고마움과 애정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서로를 부르거나,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각각의 이름은 천천히 온기를 갖는다. 처음 이름이 생겼을 때부터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던 미립자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떤 형태로든 단단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부르며 각자 이름의 주인공이 되어간다. 나는 아직 이름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