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어린이집을 향해 재아가 걸어온다. '뒤뚱뒤뚱' 걸음을 멈추고, 허리와 엉덩이를 휘감고 있는 이불을 두 손으로 치켜든다. 그것도 잠시,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불은 슬금슬금 다시 내려온다. 뒤따라 오던 재아 엄마는 재아가 넘어질까 엉거주춤 뒤따라오며 이불이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잡아준다.
"재아야~ 안녕? 오늘도 애착 이불 가져왔구나."
"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꼭 안고 왔어요."
"우리 재아~ 따뜻하겠네. 이제 신발 벗고 정리해 보자"
"이불 때문에 신발을 벗을 수 없어요."
"그럼 선생님이 잠시 이불 들고 있어 줄게."
"싫어요. 엄마가 신발 벗겨줘"
재아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 신발을 벗고 교실로 들어선다. 재아는 두 손으로 이불을 꽉 잡고 있으니 재아 가방은 나의 몫. 한 손에는 재아 가방, 한 손에는 이불 끝자락을 잡고 나 역시 재아 뒤를 졸졸 따라 간다. 요녀석, 교실에 들어와서도 이불을 놓지 않는다. 친구들이 놀잇감으로 노는 동안에도 재아는 이불 때문에 몸이 자유롭지 않다. 앉고 일어설 때마다 균형 잡기가 어려운지 두 손을 짚고 두 발을 벌려 온 힘을 다해 일어난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숭얼숭얼 맺히고 입에서는 "응차~"하는 소리가 부단히 흘러나온다. 새해, 6살이 된 재아. 언제쯤 애착 이불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2월이 되면 새 학기 첫 입소를 기다리는 부모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아이가 새로운 환경을 원만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안내하기 위해서다. 어린이집은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 생활하는 첫 사회적 공간이다. 이제껏 지켜주고 돌봐주던 엄마 곁을 떠나 낯선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공포일 것이다. 아이의 불안감을 낮추고 안정적인 적응을 돕기 위해 어린이집에서는 애착물을 가져 오도록 안내한다. 애착물은 아이가 부모와 분리되더라도 심리적 안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중간 대상이다. 즉 아이에게 애착물은 부모를 대신해 주는 상징물이다.
애착물은 다양하다. 성인 몸 채 만 한 이불부터 아이 덩치만 한 인형, 엄마 냄새가 나는 보들보들 티셔츠, 땀에 물든 누리끼리 한 베개까지. 애착물은 아이가 늘 몸에 지니고 다녀 헤지거나 색이 발해 있다. 간혹 구멍이 나고 형태가 흐트러진 것도 있지만 이 또한 아이에게는 소중한 존재다. 나 역시 소중이를 조심히 다룬다. 허락 없이 만지지 않으며, 하나의 인격체인 것처럼 인사도 해준다. 그런 날 보며 아이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연다.
문제는, 열에 일곱 여덟은 학기 끝날 때까지 애착물을 가져온다는 거다. 보통 애착물은 아이가 주변 환경에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내려놓는다. 그렇지만 한 학기를 지나 일 년을 마무리하는 시점까지 애착물을 내려놓지 못했다면 아이 주변 환경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있는지 말이다. 아이의 불편한 감정을 찾았다면 이를 존중하고 위로해준다. 제거해 줄 수 있다면 깔끔하게 정리까지. 그리고 아이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스킨십을 더 자주 하며 '너를 사랑하고 있어'라는 믿음을 준다.
바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쌍둥이 란이와 온이는 어린이집 올 때마다 자기 몸 만한 코끼리와 강아지 인형을 가지고 온다. 교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집에 돌아갈 때까지 인형은 언제나 아이들 엉덩이 밑에 깔려 있다. ‘언젠간 인형을 내려놓겠지.’라는 나의 믿음은 어느새 무너졌다. 새학기가 지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가까워지도록 아이들은 인형과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관찰하기 시작했다. 란이와 온이는 부모가 바쁜 만큼 돌보는 양육자가 여럿이었다. 엄마, 아빠, 어린이집 선생님 거기에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 아이 돌보는 이모님까지. 손을 여럿 타다 보니 애착 형성에 잘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어린이집 등, 하원 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식사를 했다. 불규칙적인 일상은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삶을 주지 않았다.
깊은 고민 끝에 어머님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아이들의 성장된 부분과 사랑스러운 일상에 대해 나눴다. 그리고 내가 느낀 아이들의 불안과 안정되지 않는 일상도 안내했다. 어머님 표정이 사라지더니 끝내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미처 알지 못했을 뿐. 어머님은 업무를 멈추고 아이들에게 집중했다.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이들은 달라졌다. 먼저 규칙적인 삶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른 등원으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었지만 어느새 적응했는지 낮잠 시간까지 말똥말똥했다. 인형의 위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이 엉덩이 밑에서 옆자리로 말이다. 엄마의 노력을 아이들이 알아주는 것 같아 나 역시 마음이 찡했다.
모든 관계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와 첫 만남부터 헤어지는 그날까지 나는 아이의 성장을 위해 관찰하고 필요 부분을 채워준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어린이집이었는데 이제는 제 집이냥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볼 때 버럭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가 편안해진 거라고 생각하니 이 마저도 마냥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