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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 and R Oct 20. 2017

27. 『오직 두 사람』 - 김영하 - 문학동네

★★★☆

기간: 2017.10.11~12

한 줄 댓글: 모든 작품의 숨은 뜻을 파악할 순 없었지만, 몰입해서 하나씩 읽는 맛이 있는 작품.


    김영하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총 7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책의 제목으로 쓰인 <오직 두 사람>은 맨 처음에 등장하는 작품이다. 제목을 봤을 땐 연인 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표지도 한 쌍의 커플이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 배경이 흐릿하고 가라앉은 느낌을 주는 걸로 보아 연인 중 한 사람이 시한부라거나 사별한 내용을 다룬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아빠와 딸의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다. 아빠는 화자(딸 현주)와 다른 자식들(오빠와 여동생)을 차별한다. 화자(현주)를 편애한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아빠의 편애가 심해지자 엄마는 막내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고 오빠도 독립한다. 화자(현주)와 아빠만 남는다.

    이 작품은 화자(현주)가 언니라는 사람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독자들은 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형제자매 중에 언니는 없기 때문이다. 화자(현주)가 아는 지인인지 아니면 어떤 대상이 있는데 비유적으로 언니라고 쓴 것인지는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아빠가 병상에 누워있는 때부터 편지가 시작된다. 그러다 편지 막바지에 잠깐의 시차가 있다.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을 치른 후에 편지를 마무리하는 형식이다.

    내용을 알고 표지를 다시 보니 연인이라 하기에는 키 차이가 많이 났다. 물론 저 정도로 키 차이가 나는 연인들도 있겠지만, 만약 표지를 그린 작가가 특별한 이유 없이 연인 사이의 키 차이를 저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이미 제목에서 연인의 사랑이야기일 것이라고 단정 짓고 표지를 봐서 저 정도의 키 차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작품 초반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언니에게 언니 자신이 소수민족이라고 상상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민족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 언니 자신과 다른 한 명만 남는다. 그 민족 최후의 2인인데, 싸우다 의절한다. 그러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이제 그 민족의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모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얼마나 고독할 것인가.' 이런 내용이다. 작품을 다 읽고 이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언니라는 대상이 사실 화자 자신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아빠와 자신과의 관계가 너무 깊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하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아빠마저 죽는 상황. 심지어 아빠와도 제대로 화해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니 실제로 자신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신세한탄 조차도 자신한테 밖에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새로운 고독함을 느꼈다. 모든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에게 어느 정도 고독함은 필요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가끔 고독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 말하는 고독은 안전한 고독이다. 내가 선택해서 들어가는 고독.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갈 수 있는 고독. 안전장치가 있는 고독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 속 화자의 고독은 완벽한 고독이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고 싶어도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아빠와 자신의 관계가 꼭, 그들만의 언어를 쓰는 소수민족과 같다. 그 와중에 아빠마저 죽는다. 그러자 자신과 같은 언어를 쓰는 존재가 이 세상에는 없다. 고로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한 명도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런 비유 없이 '아빠가 죽어서 고독하다.' 이렇게만 썼다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완벽한 고독이 잘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멸되어 가는 소수민족의 언어로 비유함으로써 화자의 고독이 내가 아는 고독과는 다르게 더 슬프다.


    다른 여러 작품들도 있지만, 그중에서 <아이를 찾습니다>에 집중해보고 싶다. 내용은 간단하다. 한 가족이 등장한다. 세 돌이 갓 지난 성민이라는 아들이 있다. 이 가족은 명절을 앞두고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남편은 핸드폰 매장에, 부인은 화장품 매장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아들 성민이 사라진다. 그렇게 11년이 지났을 때 성민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는다. 유괴범은 여자였고, 성민을 납치해서 11년간 친자식처럼 키우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아들만 찾으면 모든 행복이 다시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성민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그들 부부가 11년 동안 전단지에다 넣은 성민의 성장 모습과 실제 성민의 모습은 너무 달랐다. 거기에 아내의 조현병은 이미 너무 심해진 상태였다. 또 아들은 사춘기까지 겪는 나이고, 자신이 11년 동안 엄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유괴범이고 자살까지 했다는 충격 때문에 마음이 온전치 못하다. 이런 상황을 남편(윤석) 혼자 감당한다. 오히려 아들을 찾기 전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아내는 결국 자살을 하고 성민마저 가출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성민과 함께 집을 나갔던 옆집 여자 아이가 성민의 아들이라며 갓난아이를 놓고 도망간다.

    이 작품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들과 조금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초점이 아이를 찾고 나서의 삶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가족과 생이별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재회 후의 삶. 김영하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아이를 되찾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그 아이를 되찾는 순간부터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겨끈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269p) 이런 초점이 다른 스토리들과 구별되는 부분이다. 아이를 찾으면 해피엔딩? 보통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찾고 나서의 삶도 이성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작품의 숨은 뜻을 잘 파악했는지는 모르겠다. 마무리가 모호해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작품도 있다. <옥수수와 나>는 이야기 전체가 의심스럽다. 이 작품의 내용 전부가 조현병 증상으로 주인공의 상상인지, 아니면 알약을 먹기 전까지는 멀쩡했는데, 알약을 먹은 후에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것인지 분별이 안 된다. 또,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최은지와  박인수>도 마찬가지다. '위선이여, 안녕.'(231p)라는 말은 자신이 최은지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겠다는 것인가? 이것 또한 판단하기가 어렵다.

    김영하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순 없었다. 내 독서력이 아직 부족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작품에는 몰입이 잘 되었다. 숨은 의도는 파악할 수 없지만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는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독서력을 더 커지면 숨은 의도도 잘 파악할 수 있으리라. 대부분의 단편이 그렇겠지만, 잠깐 짬이 생겼을 때 금방 몰입하여 한 작품씩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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