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전공의 S, 하

by 달하

며칠 뒤 간호사가 말했다. 선생님 이분 할머니 아드님이 한 명 있대요. 꽤 오래 서로 연락을 안 하고 지냈나 봐요. 지금 원무과에서 전화번호를 알아내긴 했다는데, 연락 한번 해보셔야 될 것 같아요.


종종 있는 일이라 덤덤하게 아들에게 전화했다. 간략히 할머니의 상황을 전하자 아들은 며칠 내로 내원하겠노라고 했다. 할머니에게 아들이 곧 올거라고 전해드렸다. 가족이 있는데도 왜 없다고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이틀 후 그가 내원했고 모자는 서먹하게 마주 앉았다. 그 눈빛과 세월 사이에 타인에게는 말하지 않을 비밀의 강이 조용히 흘렀다.


현재로서는 2주를 사실지 3개월을 사실지 저희도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수개월 내에 임종이 예상됩니다. 다만 최근에 폐렴에 자주 걸리셨어요. 많은 말기암 환자들이 급작스러운 합병증으로 임종합니다. 폐에 암이 퍼져있고 폐렴도 잘 생기는 상태라,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지실 거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면 그때는 인공호흡기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패혈증으로 혈압이 떨어질 수도 있고요 .그럴 때에는 혈압을 올리는 약이 필요할 수 있어요. 심폐소생술이 필요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처음 만난 아들에게 할머니의 긴 병력을 짧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최악을 담보하는 이야기가 더 많이 오갔다.

선생님,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십시오. 최선을 다 해주세요.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

이 말은 환자를 자주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환자를 만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지만 기꺼이 시간을 내지 않은 보호자들이 더욱 간절히 그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은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의사들에게 '현대의학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환자를 가장 위하는 것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아니오라고 답한다. 그때의 나도 그것이 이분 할머니에게도 최선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가 말기암으로 곧 임종하실 수도 있음을 한 번에 통지받은 자식에게 그것이 '최선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은 노력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타인에게 나의 가치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설명을 포기했다. 나에게는 챙겨야 할 환자들이 이미 많았다.


노란 치마를 입고 외출을 하고 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분 할머니의 폐렴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자 할머니의 총총하던 정신은 샛별처럼 사라졌다. 우리는 그녀를 중환자실로 다시 옮겼고 뗄 기약을 하지 못한 채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하루가 다르게 할머니의 얼굴과 온몸은 부어갔고, 과거 옆자리의 할머니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최선을 다해 달라던' 아들은 거의 방문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그렇게 중환자실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광범위 항생제를 사용하다 더 이상 사용할 항생제가 없어 듣지도 않을 약제를 유지했다. 심장이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렵다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혈압이 떨어졌다. 내가 할머니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중환자실 코드 A가 전 병원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중환자실에서 한 생명이 꺼져간다는 안타까운 외침이었다. 심폐소생술이 시행되었고 곧 그녀의 얼굴 위로 흰 천이 덮어졌다.


목 구녕에 관 넣고 가슴 두드리는 거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할머니 곁을 지켰을 그 말을 나는 무시했다. 할머니의 말은 허공에서 갈 곳을 잃었고 나의 후회도 그 곁을 서성였다.


6월 15일 5시 39분, 김이분 님 임종하셨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아들에게 임종선언을 하고 할머니의 기도에서 관을 제거했다. 관 끝에 낀 누런 가래를 보니 문득 할머니의 누렇다던 개가 생각났다. 할머니가 이 순간 남기고 싶었던 것은 누런 가래가 아니라 누렁이와의 추억 아니었을까. 그가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방기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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