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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달하 May 09. 2019

의사 할아버지, 저 이제 안 아파요

제발 일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독일에서의 두 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을 즈음이었다. 회사에서 스위스에 있는 고객사의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는 중이었다. 큰 성과 없이 첫 해를 다 보내버릴까 봐 걱정이었는데, 연말에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어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날밤을 새 가며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교육자료 등을 만드느라 조금 무리 했던 건지, 아님 그냥 혹한 겨울 날씨 버티지 못했던 탓인지, 나는 오랫동안 준비한 발표 일정을 2주 앞두고 몸살이 나 버렸다. 마음은 조급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낫기는커녕, 목소리마저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출근 전에 동네 병원으로 나섰다.


그때 나는 우리 동네 의사 할아버지(남편과 나는 Dr. Grandpa라 부른다)를 처음 만났다. 우리 집 바로 앞, 큰길만 건너면 보이는 작은 가정집 1층에 아침 일찍 문을 여는 동네 의원. 독일에서는 병원 예약 잡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라, 제대로 진료 한 번 받으려면 한 두 달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허다한데, 이 곳의 의사 할아버지는 웬만하면 예약을 받지 않고, 일찍 오는 환자부터 진료해 주신다. 그래서 7시부터 문을 여는 이 곳에는, 자주 진료를 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침부터 대기실에 쪼로록 앉아 계신다. 덕분에 나도 출근 전 일찍 병원에 들러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내 차례가 되자, 할아버지 선생님은 진료실을 천천히 걸어 나와 대기실에 있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뒤, 더욱 천천히 나를 에스코트하여 진료실로 들여보내 주셨다.


"어디 보자, 아이고, 그냥 감기가 아니고 편도선이 심하게 부었네. 많이 아팠겠어요."


두꺼운 안경에 그보다 더 두꺼운 손가락을 가진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우쭈쭈쭈'하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첨단기기 하나 없는 진료실에서, 마디마디가 굵어진 손가락과 낡디 낡은 청진기 하나로 나를 여기저기 훑어보고 톡톡 쳐보시더니 그렇게 말씀하셨다.


"혹시 직장이 있어요? 일주일은 집에 있어야겠는데요. 내가 문서 써줄 테니 당분간은 집에서 쉬어요."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집에 와서 의사 선생님이 써주신 노란 종이는 책상 위로 휙 던지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퇴근하고 집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나를 발견한 남편은 버럭 화를 냈다. 의사 선생님께서 쉬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고, 어차피 아픈 상태로는 일의 효율도 안 오르니 그냥 침대에 누워있으라는 것이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일주일 정도 잘 쉬고, 다가올 발표 일정에 차질을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일주일 뒤 다시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다.


"열은 많이 내렸는데, 아직은 더 쉬어야겠어요."


의사 할아버지께서 인자한 목소리로 말하셨다.


"저 이제 안 아파요. 이 정도면 잘 쉬었고, 곧 회복될 것 같아요. 하하."


당황한 내가 대답했다. 나는 연이어 중요한 발표가 잡혀있고, 다음 주에는 스위스로 날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아니야, 제대로 쉬지 않으면 더 고생해요. 내가 노란 종이를 써 줄 테니 회사에 얘기하고 쉬어요."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했지만,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는 점점 단호해질 뿐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더욱 강경히 출장을 취소하고 집에 머무르라 거듭 이야기를 했고, 결국 나는 최선을 다해 준비해왔던 발표를 취소하고야 말았다.




결혼 전 남편과 장거리 연애를 할 때, 가끔 감기가 걸린 목소리로 회사출근하지 않았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면, '에계, 겨우 감기로 회사를 안 간 거야?'하고 생각하곤 했다. 목소리가 안 나오고 오열이 있어야만 병가를 썼던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속으로 너무 나약한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독일에서는 감와 같은 가벼운 질병이라 할지라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학교나 회사에 나가지 않는단다. 실제로 병원에 가면 적어도 3일은 집에서 쉬라며 노란 종이를 받게 된다. 약해진 몸으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생각함 동시에, 아픈 몸으로 회사나 학교에 머무르는 것이 오히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지만 나는 이러한 상식에 적응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개인사는 접어두고 회사일부터 챙겨야 성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나라의 문화와는 참으로 다른 이곳에서의 경험은 이뿐 만이 아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지역 전체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부사장님께서 분기에 한 번 열리는 미팅 한 시간 전에 전체 메일을 보다.


"... 오늘 저희 아들이 많이 아파미팅을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오늘 미팅은 다른 매니저가 수고해주실 예정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쩌면 독일에서는 평범할 수 있는 이 메일, 나에게는 아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부사장님이 여성이기에 더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회사 안에서 남편이나 자식 이야기를 꺼리게 된다는 여자 선배들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몸상태뿐만 아니라, 배우자나 아이가 아파 재택근무를 신청하거나 병가를 쓰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상식대로 돌아갈 뿐인데, 나는 왜 이런 부분이 질투가 날만큼 부러운 것일까. 남편 회사에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출근할 수 있는 별도의 사무실도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그냥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누릴 수 있는 것에 기뻐하면 그만인데, 나도 모르게 고국에서의 옛 직장생활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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