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주문한 택배 상자가 근처 상점에 보관되어 있다는 메모를 받고, 차로 10분 즈음 걸리는 주유소 안 작은 가게로 향했다. 구글로 검색해보니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고 하여 부랴부랴 서둘어 4시 55분에 가게의 문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카운터에서 정산을 하고 있던 주인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기분 좋게 문을 열려했는데 벌써 문이 꽁꽁 잠겨있었다. 나는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어, 안에 계신 아주머니께 신호를 보냈다. 살갑게 다가와 문을 열어주실 거라 믿었던 아주머니는'내가 왜 너에게 문을 열어줘야 하지?'라는 쌀쌀맞은 표정과 함께, 가방을 들고 뒷문으로 휙 나가버리셨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아직 문 닫을 시간이 5분이나 남았는데. 나는 집에 돌아와 화가 난 목소리로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남편은 뭐 그 정도 일에 열을 내냐며 의아해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의 일이다. 한국에서 놀러 온 가족들과 올해 첫 크리스마스를 맞는 아들 이든이를 데리고 집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아주버님 댁으로 놀러를 갔다. 2박 3일 그곳에 머무를 예정이라, 이것저것 챙기고 보니 큰 캐리어에 짐을 담고도 잔잔한 가방이 여러 개가 될 만큼 양 손이 무거워졌다. 부모님과 오빠네 가족까지 식구들이 많다 보니 준비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허겁지겁 아침을 챙겨 먹고 집을 나서, 아주버님 댁으로 차를 몰았다.
예쁜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 아주버님 댁에 짐을 풀고, 빵빵한 아드님의 기저귀를 갈아주려던 순간, 아뿔싸. 이든이의 기저귀 가방을 두고 온 것이 아닌가.다행히 한 두 개의 여분은 있었지만, 3일을 버티기에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었다. 슈퍼마켓은 이미 주말부터 문을 닫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유소에 딸린 작은 가게들을 찾아다녀 봤지만 간단한 음료와 스낵뿐, 아기 기저귀를 파는 곳은 없었다. 나는 '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기 아기의 기저귀를 까먹고 여행을 다니나'싶은 생각에 가족들 앞에서 창피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던 순간, 형님께서 이웃 중에 아기가 있는 집들이 있으니 한 번 찾아가 보자고 하셨다. 다행히도 젊은 가족들이 많이 동네라 아기가 있는 집도 꽤나 있었다. 여러 집 연락을 돌린 끝에, 이든이가 며칠 버틸 수 있는 만큼의 기저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독일에 와서 가장 놀랐던 점은 대부분의 가게가 일찍 문을 닫는다는 점이었다. 24시간 불이 켜진 편의점이나 음식점에 익숙했던 내게, 평일에 일찍 문을 닫는 약국이나 옷가게 때문에 퇴근을 하고 물건을 사러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생활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슈퍼마켓만 해도 일요일에는 아예 문을 열지 않으니 토요일에 미리 주말에 먹을 것들을 예상해서 장을 봐 두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낯선 환경에 불편함을 토로하던 내게 남편이 말했다.
"가게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가족이 있잖아. 주말이나 휴일에는 그분들도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야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중국집을 하시느라 주말에도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만 하셨던 부모님 생각이 났다. 오빠와 나는 매일 저녁 날이 저물면 엄마 아빠 없이 잠이 들었고, 주말에도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손님이 먼저라고 생각하셨고, 가게 문을 일찍 닫거나 주말에 문을 열지 않으면 손님이 줄어들거라 걱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손님이 먼저, 손님은 왕'이라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마인드가 아직은 더 익숙하지만, 독일에서는 이런 사고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특히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들이나 관공서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을 보면, 무표정한 얼굴에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인 분들이 있다. 나도 예전에는 처음 경험해보는 당당한 불친절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분들의 마인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일은 이 물건들을 계산하는 것이오, 그대는 그대가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시오.'
'그대 볼일만 보고 어서 가시오, 내 일은 당신에게 미소를 파는 것이 아니라오.'
어쩌면 매우 당돌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친절함을 강요받지 않으니, 일을 하는 당사자로서는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한국에서 받았던 황송한 친절까지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환한 미소를 보내는 우리나라와는 다르지만, 대부분 인사도 먼저 건네고 농담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도 잘 만든다. 또한, 본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 최대한 상대방의 편의도 봐준다. 다만, 강요받지 않기에, 본인의 기분에 따라 자연스레 행동할 뿐이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냐로 가르기에는 그리 쉽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 독일의 가게들은 법이 규정한 시간만큼 운영되고 있을 뿐이고, 독일 사람들은 점원들에게 필요 이상의 친절을 바라지 않을 뿐이다. '독일 사람은 불친절하다'라고 말하기에는, 종업원과 손님의 관계를 떠나 평범한 개인 대 개인으로 그분들을 만나보지 않고서는 정의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이곳에서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독일 사람들은 이래, 독일은 이런 나라야'라고 쉽사리 정의하고 싶지가 않다. 어느 나라든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친절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점원분들의 친절도는 그 나라의 문화와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