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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Aug 26. 2018

계절감

빙그르르 주위를 둘러보니 가을이었다

오늘 밤거리를 걷는데 바람이 선선했다. 가을이구나 생각한 순간, 살갗에 닿는 계절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너무 더워서 영영 여름일 것만 같았는데. 하루 만에 계절이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은 생경하고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나는 조금 슬퍼졌다.

올해 나는 두 살배기 아이들과 즐거운 날들을 보냈다. 그 시간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단 사실이 문득 슬프게 다가왔다. 이맘때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라서 불과 두 달 전 모습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아이들과 늘 지금을 살았던 것 같다. 과거도 미래도 계절도 잊고 눈앞에 오늘만 함께 살았다. 그러다 빙그르르 주위를 둘러보니 가을이었다.

올해가 네 달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저런 단어를 말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은 네 달 후엔 짧은 문장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계절은 바뀌어 겨울일 테고. 그때의 어느 순간, 언제 이렇게 컸나 하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기분은, 마치 하루 만에 달라진 계절을 실감하는 오늘 같은 기분일 것 같다. 기쁘지만 조금 슬프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사무치는 밤이다.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조금만 더 지금에 머무르고 싶다. 아, 행복은 어째서 이토록 서글픈 걸까.



귀퉁이가 좋았다
기대고 있으면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낯이 익고 있다
냄새가 익고 있다
 
가을은 정작 설익었는데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땀이 흐르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땀이 흐르는데도
나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지 않은 일
 
우리는 아직 껍질 안에 있다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을 펴보니
다행히 여름이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 오은, 계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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