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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Feb 19. 2019

현준

그러면 나는 다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일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면 옷부터 갈아입는다. 딱딱한 양복은 빨리 접어 옷걸이 맨 안쪽에 잘 감춰둔다. 고시원 방은 생각보다 더 좁아서 잘 감춰지진 않는다. 벌써 이만큼이나 늘어난 반바지를 대충 허리에 걸치고, 그 반바지를 거의 다 가려버릴 만큼 널널한 티셔츠를 입는다. 그리곤 슬리퍼를 끌고 아주 천천히 옥상에 올라간다.


옥상이란 곳이 으레 그렇듯 풀은 없고 오래된 흙만 담긴 화분이 두어 개 있다. 나는 제일 큰 화분에 앉는다. 눈을 감고 한숨을 한 번 깊게 후- 뱉으면 이제 난 나무다.


내가 굳이 나무여야 하는 이유는, 움직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없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거다. 나는 화분의 오래된 흙을 붙들고 가만히 있을 거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가만히 있을 거다. 가지 끝까지 힘을 주고 바람과 대결하는 소나무처럼 멋진 나무는 아니다. 바람이 불면 이쪽으로 우수수 저쪽으로 우수수, 가지를 떨어대는 그런 나무다.


그렇게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다가 시간이 되면 천천히 눈을 뜬다. 어제보다 더 느리게 슬리퍼를 움직여 아래층 방으로 돌아간다. 깊이 넣어둔 양복은 어제보다 더 딱딱해진 것 같다. 팔다리를 간신히 욱여넣고 문을 열어나간다. 그러면 나는 다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마음 쓰는 밤> 현준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낮에는 나로 살아가다가 밤마다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다면, 나무로 변신하고 싶다는 현준님. 밤새 화분의 오래된 흙을 붙들고 바람결에 흔들리다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는 마지막 문장이 서늘한 여운을 남깁니다. 어쩌면 우리는, 긴긴밤을 보내고 다시 사람으로 변신해 문밖을 걸어 나가는 존재는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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