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찻잔은 나를 향한다

김율희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

by 고수리

지난번 엄마가 올라왔을 때, 폴란드 핸드페인팅 찻잔을 구경하다가 서로에게 선물해줬다. 찻잔 하나씩을 골라 따로 계산하고 포장한 잔을 서로에게 건넸다. 그때 이 책이 생각났다.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 작가는 핸드페인팅 찻잔에 대해 '사람이 그린 그릇은 모두가 세상 유일한 존재'라고 했었다. 엄마와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고받은 기분이었다. 세상 유일한 찻잔을 하나씩 나눠 가졌으니까.


요즘은 글 쓰거나 책 읽을 때, 엄마가 선물해준 찻잔에 따뜻한 커피나 차를 마신다. 겨우 찻잔 하나 들였을 뿐인데 그 시간이 특별해졌다. 여유롭고 편안하고 의미 있다.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도 내가 선물해준 찻잔으로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좋아하는 찻잔이 생긴다는 건 나만의 시간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찻잔이 생겼다. 유명한 브랜드에 디자인이 세련되거나 값비싼 잔은 아니지만, 누군가 정성으로 그린 잔이자 엄마에게 선물 받은 유일한 잔이다.


20190428_132756.jpg 엄마와 서로에게 선물한 찻잔


모든 찻잔은 나를 향한다. 무언가 해야만 하는 일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차를 불어 마시며 잠시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 스스로를 먼저 살피는 시간. 그 시간이 끝나야만 잔에서 시선을 거두어 내 앞의 상대방에게 눈을 옮길 수 있다. 결국 우선순위는 나다. 자신이다. 온 세포 하나하나가 잠시 잠깐 모두 나를 향한다. 찻잔이 좋고, 차를 마시는 시간이 소중한 건 결국 나를 향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 김율희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 52p


좋아하는 찻잔처럼 좋아하는 책도 그렇다. 요즘 에세이 트렌드와는 맞지 않지만, 나는 긴 호흡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편이다. 군더더기 없이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작가의 경험과 생각, 문체가 담담히 묻어나는 글이 좋다. 그 내용이 알차다면 더더욱 좋고. 그런 의미에서 김율희 작가의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는 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오늘 이 책이 2년 만에 중쇄를 찍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꾸준히 사랑받고 있구나'하고 흐뭇해졌다. 알려지지 않은 좋은 책들은 마치 핸드페인팅 찻잔 같다. 거대한 공간에 전시되어 있진 않지만 눈에 띄게 반짝이진 않지만, 자기만의 생김새와 분위기와 이야기를 가지고 조용히 놓여있다. 알아보고 책장을 열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 책이 그렇다. 내 책도 이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에는 운명처럼 알아봐 줄, 유일한 독자에게 오래도록 아껴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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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밥그릇이 몇 개인 것까지 안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그릇이란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만 나눌 수 있는 아주 내밀한 취향이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보이고자 들인 물건이 아니니 나의 찬장은 오직 내가 좋아하는 그릇으로만 가득하다. 이 컬렉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 그릇들과 더불어 일상을 공들여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그릇에 좋아하는 음식을 담아 음미하며 한순간 한순간 정성을 다하고 싶다. 정리할 것이 없는 삶을 살기보다는, 내 물건들을 정리하며 한 번 더 나 자신을 마주하고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 대단할 것 없는 나일지라도 고단한 일상이더라도, 기꺼이.
- '작가의 말' 중에서


유명하고 화려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유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서 나의 꿈은 안목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물의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인 능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이다. 좋은 옷, 좋은 책, 좋은 소품, 좋은 그림, 나아가 좋은 사람을 알아채는 것은 유행을 좇아 될 일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다. 세상사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고 역사와 철학, 예술을 멀리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제법 근사한 삶이란 그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109p


나를 귀하게 여기는 일에도 '나 하나부터'라는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생활의 우선순위는 나와 가장 가까운 것에 두어야 한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 천연 소재의 속옷, 보드라운 침구, 향이 좋은 차와 내용이 알찬 책, 알맹이가 먼저고, 그를 담는 그릇과 가구는 그다음이다. 이 물건들이 찾기 쉽고 서로 조화롭게 정리된 집이 그다음, 그리고 정말 집 밖으로 나가서야 진가를 발휘하는 옷과 액세서리 등은 가장 마지막이다. 좀 외지고 작은 집에 차림은 좀 부스스하더라도 빵 냄새와 차향기가 가득한 집에 있는 누군가는 꽤 매력적이지 않나. -1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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