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버리는 것인 줄만 알았지
스무 살 겨울, 학교 도서관에서 케이를 처음 만났다. 그 애는 아무도 없는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웃는 얼굴. 풍덩, 나는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스물한 살 봄, 나는 교양수업에서 우연히 케이를 다시 만났다. 늘 강의실 앞쪽에 앉아서 수업을 듣던 나였지만, 그 수업만큼은 케이의 뒷자리에 앉았다. 아니면 아예 반대쪽 건너편, 케이의 얼굴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그 애를 몰래 훔쳐보았다.
케이는 옷차림이 깔끔했다. 프린트 없는 단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등을 곧게 펴고 앉은 뒷모습도 단정했다. 케이의 뒷머리를 쳐다보다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공연히 고갤 숙였다. 출석 부르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손을 드는 케이를 보고 그 애의 이름을 알아냈다. 정작 내 이름을 부를 땐, 그 애를 보느라고 대답할 차례를 놓치고 말았지만.
케이는 대체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큰 키에 마른 몸, 흰 피부에 유난히 까만 머리, 쌍꺼풀 없이 날카로운 눈, 굳게 다물었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 군더더기 없이 시크한 인상의 케이는, 날렵하고 도도한 검은 고양이 같았다. 언제나 홀로 조용했지만, 간혹 이어폰으로 새어 나오는 노래들은 시끄러웠다. 나는 그 애의 세계가 궁금했다.
케이의 이름을 알고부터 자주 그 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찾아갔다. 케이는 일렉트로닉 뮤직 디제이였다. 배경음악과 음악보관함에 일렉트로닉 뮤직이 가득했고, 해외 뮤지션들의 뮤직 비디오가 자주 업로드되었다.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록밴드 오케이 고OK Go도 있었고, 다프트 펑크Daft Punk도 있었고, 다이시 댄스 Daishi Dance 같은 뮤지션들도 있었다. 미니홈피 배경음악인 다프트 펑크의 <Something About Us>를 들으며 “내 손에서 무지개가 흘러.”라고 쓴 게시글을 읽었다. 도곤도곤 내 가슴 뛰는 소리가 노랫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Cause there’s something between us anyway”라는 배경음악의 가사처럼, 어쨌거나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기를 바랐다. 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케이를 따라갔다. 케이는 이어폰을 낀 채 성큼성큼 걸었고, 나는 거의 뛰다시피 그 애를 쫓아갔다. 강의실 건물을 나와 캠퍼스를 지날 때쯤, 그 애의 팔을 와락 붙잡고 무작정 초콜릿 하나를 내밀었다. “친해지고 싶어요!” 그러자 그 애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했고,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 케이에게 말을 걸던 날, 나는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케이는 그걸 기억했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알랭 드 보통이라고 했다. 그가 쓴 책 중에서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가장 좋아한다고. 그건 당연했다. 사실 나는 케이의 미니홈피에서 읽은 게시글로 그 애의 취향을 미리 알고 있었다. 표지와 제목이 선명히 보이도록 책을 품에 안고 명백히 계획적으로 다가간 거였으니까. 자연스럽게 알랭 드 보통 철학의 깊이에 대해, 일렉트로닉 뮤직의 근사함에 대해 화제를 꺼냈다. 케이가 신나서 이야기했다. 그 애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냥 좋았다.
그러나 찰나였다. 케이는 어느 순간 내 연락에 답하지 않았고, 나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우리 사이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그 애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할 때마다 마음이 데인 것처럼 따가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말 걸지 말걸. 괜한 용기만 냈다가 망해버렸네. 케이는 시크하게 멀어졌지만 나는 지질하게 한 학기 내내 케이를 피해 다녀야 했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기를 바랐던, 사랑보다 선망에 가까웠던 서툰 짝사랑. 나, 다시는, 첫눈에 반해버리는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씩씩거렸다.
그러나 멍청이는 금방 까먹어버린다지. 스물여섯 살 봄 나는 또 한 사람에게 풍덩,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는 회의실에서 마주친 협력업체 디자인 실장님이었다. 청바지와 야상점퍼 차림의 실장님은 덥수룩한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얼굴이 뭐랄까, 줄리앙 석고 데생을 아름답게 그릴 것 같은 미대 오빠 같았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더니, 실장님도 “안녕하세요.” 마주 인사하며 웃었다. 실장님 얼굴이 동그래지면서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이를 히 드러내며 소년같이 웃는 그 얼굴을 보는데. 어라라. 동그래진 마음이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풍덩, 나는 실장님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선배에게 연락처를 물어 곧바로 연락했다. 부끄러운 과거는 그새 까먹고 다시 첫눈에 반해 부릉부릉 달려갔다. 며칠 뒤, 우리는 홍대에서 다시 만나 막차가 끊길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다음 날부터 4년을 더 만났고, 결혼했다. 그 실장님은 지금 내 남편이다.
서로가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한 운명적인 사랑이었다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하지만 남편은 나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았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보니 자꾸만 눈에 들어오던 괜찮은 친구였다고. “첫눈에 반하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거야. 사랑은 아주아주 신중해야 해.”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내 속만 부글부글거렸다. 어쨌든 첫눈에 반한 사람과 자꾸만 눈이 가던 사람이 만나 신혼집을 꾸리게 되었다.
그런데 가구들을 구경하다가 사실은 남편도 첫눈에 반해 버리는 멍청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첫눈에 번지르르한 가구들에 반해서, 덜컥 사버리려는 남편의 팔을 낚아채며 나는 말했다. “이것도 괜찮은데, 몇 번 더 보고도 마음에 남는 걸로 하자. 이런 건 아주아주 신중해야 해.” 그런 남편이 귀여워서 나는 고소하게 웃었다.
씩씩한 멍청이 같지만, 솔직해서 사랑스러웠던 여자,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가 말했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버리는 것인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것인 줄은 몰랐어.”
아무래도 나쁠 것 없다. 첫눈에 반하든, 자꾸만 봐야 맘에 들든. 처음부터 풍덩 빠져버리든, 서서히 물들어가든. 어쨌든 그건 사랑이니까.
고수리 에세이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