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엉망이고 진창이며 눈 씻고 찾아봐도 좋은 소식과 전망은 하나도 없지만 내가 소설로 쓰듯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는 일하고 누군가는 청소하고 누군가는 사람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트랙처럼 둥글게 산책하는 날들. 아무 변화도 없지만 그 사이 시간은 흐르고 종종 기분도 마음도 나아지는 밝은 밤들. - 정용준 <선릉산책> 269p 작가의 말
정용준 소설집 <선릉산책>. 슬픔과 상실과 체념을 겪은 사람들이 묵묵히 걸어 다닌다. 산책하듯, 살아가듯.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답다. 흰 눈처럼 밝은 바다처럼 깨끗한 빛이 스미는 것 같다. 눈과 바다와 산책과 풍경.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두 담겨 있어서일까. 그래서 내가 이 소설들을 좋아하는 걸까. 엉망이고 진창인 삶을 애써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만해 보여서, 아름다운 풍경에 스며든 또 다른 풍경 같아 보인다. 풍경은 세상 모든 작용에 흔들리고 변하고 그럼에도 제자리를 지키며 아름답다. 가만하지만 아름다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바닥을 보고 걷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하늘과 눈과 바람과 나무와 바다를 발견한다. 무언가 느끼고 생각하고 간직한다. 그렇게 산책하듯이 내내 걸으며 나도 사람들을 발견하고 싶다. 오래 견디어 아름다운데 깊숙이 이야기를 숨긴 사람들을.
좋아서 수집해둔 문장들
두부가 없다. 소철은 그사이 한뼘쯤 커졌고 색은 더 진초록으로 짙어졌다. 건물을 한 바퀴 돌며 두부의 이름을 불렀다. 할머니가 불렀던 멜로디를 허밍으로 흥얼거렸다. 아무도, 누구도, 무엇도, 없었다. 19p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다보면 발밑으로 온갖 쓰레기가 밀려들었다. 전망. 예상. 예감. 상상. 하나같이 나쁘고 안 좋은 것들뿐인 미래. 27p
거리를 걷는 사람들, 모두 모르는 얼굴, 거울 속 내 얼굴도 모르겠네. 38p
더는 화낼 힘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냥 눈을 뜨기가 힘들고 너무 속이 상해서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63p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상처받은 이의 얼굴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할일을 할 것이고, 잘 자고, 잘 먹고, 잘 지낼 것이다. 204p
나는 내 삶에서 뭘 배웠나. 무엇을 알고 있나. 그래서 얼마나, 얼마큼, 표현할 수 있나. 솔직하게? 순간 마음을 뚫고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217p
갑자기 몹시 쓰고 싶고 그 힘으로 살고도 싶어지는 이 마음. 더는 쓰기가 좋다, 라고 하지 않을 거야. 쓰기가 나를 좋아하니까. 26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