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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북스 김희영 Dec 18. 2022

나의 첫 사회생활

퇴사 기념 _ 나를 위한 기록 (1)

2007년 4월 19일 ~ 2022년 10월 14일

16년을 함께한 나의 직업과 안녕을 고하다.




#1. 2007년 4월, 사회생활의 시작


2007년, 대학교 2학년 시절 아르바이트로 학원강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범대에 다니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알바였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과 공부를 하는 것이 내 공부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공부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정말로 교과 과정을 달달 외울 만큼 큰 도움이 되었다.


주 2회, 저녁 6시~10시에 출근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나의 첫 제자들! 어렴풋이 얼굴이 기억난다. 남중생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21살의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7년의 최저임금은 3480원이었다. 그 당시 나는 시급 8~9천 원을 받았다. 주 2회 출근한 나의 첫 월급 29만 원! 그중 절반인 15만 원은 주택청약과 적금을 들고, 나머지 14만 원으로 한 달을 생활했다. (나는 그때부터 생활력이 강했구나!)


그렇게 경험을 쌓다가 투잡을 하게 되었다. '월수금 출근'과 '화목 출근'으로 나누어 2개의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경험이 쌓이면서 시급도 더 올랐다. 그리고 힘들기만 했던 아이들 다루는 방법에도 노하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학원강사 생활에 익숙해졌고, 점점 재미도 느끼게 되었다.




#2. 2009년 4월, 교생 실습


대학교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학원 투잡 생활도 여전히 하고 있던 때였다. 즉 매일 아침 7시~ 오후 5시는 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바로 학원으로 출근해 밤 10시까지 일을 했다. 너무너무 힘들어서 살이 쭉쭉 빠졌었다.


그런데! 이 교생 실습이 나의 꿈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학원강사는 거쳐가는 알바일 뿐, 나의 꿈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임용고시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학원강사보다는 교사가 더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생실습에서 경험한 학교생활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근무시간은 종일인데, 수업은 하루에 3~4개만 하고 나머지는 실무를 보았다. 물론 공무원이기에 실무도 중요함을 알지만, 그 당시 내가 보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학교는 학원만큼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지 않았다. 인원이나 진도 등의 문제로 딴짓하거나 엎드려 자는 아이들을 어느 정도 모른 척하며 수업을 해야만 했다. 학원에서는 별 짓을 해서라도 아이들 집중시키는 게 제일 중요했기에 그런 부분이 적응되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의 현실상 어쩔 수 없음을 안다)


교생실습을 나간 한 달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지만, 나는 이때 이후로 나의 진로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학교 생활이 나와 맞지 않음을 조금 알게 되었다.


반면, 학교 근무가 끝나고 저녁에 출근한 학원에서는 날아다니며 수업을 하는 나를 알게 되었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 듯 재미있고 신이 났다.




#3. 2009년 7월, 인식의 전환


그렇게 교생실습이 끝난 후, 4학년 2학기는 대학교 수업이 적었다. 그동안 미리 들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지역에서 규모가 크기로 소문난 대형 학원으로 면접을 갔다.


카리스마와 포스가 있는 원장님과의 단독 면접이었다. 그분은 국어강사였던 나에게 가정 책을 건네주었다. 아무 페이지나 펴서 수업을 해보라는 것이다. 


"원장님~ 저는 국어강사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제가 채용 공고를 잘 못 본 것일까요?"

"아닙니다. 국어강사를 채용하고 있습니다. 저희 학원은 다른 과목으로 시강(시범강의)을 합니다."

"네??? 내용을 잘 모르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내용을 얼마나 잘 가르치는 것을 보는 게 아닙니다. 선생님의 태도를 보기 위함입니다."


속으로 이상한 학원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런 학원에서는 굳이 나도 일하기 싫었다. 그래서 아무 페이지나 펴서 아무렇게나 시강을 했다. 대충 눈에 보이는 글자들을 조합해서 말을 지어냈다.


약 10분 정도의 시강이 끝나고 원장님의 몇 가지 질문이 오갔다. 왜 임용고시에 집중을 안 하고 일을 하냐는 질문을 주셨다.


"저는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알바를 시작했는데, 가정 형편상 제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더 많이 일하는 곳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임용고시 준비를 하며 일을 병행할 예정이지만 책임감 있게 근무할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1시간이나 더 나눴다. 거의 내 이야기 위주였다. 당시 50대로 보이던 그 원장님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셨다.


그리고 면접비라고 봉투에 3만 원을 넣어주시며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선생님은 학교에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분이네요. 오늘 본 잠깐의 수업 동안 선생님 표정이 얼마나 생기 넘쳤는지 모르시죠? 더 재밌는 곳에서 수업하세요. 제가 보기에 선생님은 학원강사 체질인 것 같아요."


교생실습 이후 임용고시 공부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내 고민을 고스란히 들킨 듯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학교에 있기 아까운 분'이라니! 그 한 마디가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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