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부모란 자녀를 거부하지 않고 사랑하는 부모다.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싸워야 할 때 싸울 줄도 안다. 정신의학에서는 행복의 핵심을 '자존감'이라고 본다. 자신에게 만족하고 사랑스럽게 느끼는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평가이다.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행복을 결정한다.
- 책 <(엄마와 아이를 이어주는) 따뜻한 무의식> 중
우리 으누가 어떤 모습으로 자랐으면 좋겠는지를 떠올려 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는 바로 '자존감'이다. 정신의학에서는 자존감을 행복의 핵심 요소로 본다고 한다. 자존감이 있는 아이는 어디서든 당당하고 자기가 주인이 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란 무엇일까? 자존감이란 '자신에 대한 평가'라고 이 책에서 설명한다. 즉 내가 어떤 현실이든 간에 '나 자신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자존감의 점수는 달라진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 또는 '나는 유능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그 반대다.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사람임에도 유난히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자존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 책에서 자존감은 단연 부모에게서 온다고 설명한다.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자존감은 높아질 수 있으며, 부모의 자존감이 아이에게 대물림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굉장히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의 자존감 점수는 몇 점일까? 10점 만점으로 내 자존감의 점수를 매겨봤다. 나는 적어도 8~9점은 되는 듯하다.
나는 내가 굉장히, 대단히도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오만함이나 거만함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잘난 사람'이라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어떤 일을 할 때 두려움은 있을지언정 '우선 해보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강하다. 혹시나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니 어차피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나는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굉장히 둔하고 무감각하다.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 이건 귀찮아하는 나의 성격인지, 자존감이 높은 영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춘기 시절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귀찮다.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나다. 내 할 일을 열심히 잘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나는 자존감이 남들보다 높은 편이긴 한 것 같다.
나의 높은 자존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도 역시 부모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말들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자랐다.
"희영이 너는 현명하고 똑똑해서 네가 하는 일은 모두 맞아. 잘 될 거야!"
"너는 엄마아빠가 착하게 살았으니 분명히 복 받고 잘 살 거야!"
30대 중반의 젊은 딸 부부가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간다고 했을 때도 우리 부모님은 박수를 치시며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너희는 그 어디를 가서도 잘 살 수 있어! 특히 으누가 복덩이니 너희가 하는 일은 모두 잘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이런 말들을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듣고 자랐기에 나는 당연히 내가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힘든 일이나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어차피 난 될 놈인데 뭐!'라는 생각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모든 시련은 모두 잘 풀리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 시간을 견뎌내고 나면 '역시 난 될 놈이구나!'라는 자신감이 쌓여갔다.
나는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무조건적인 믿음,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잘 되리라'는 무모한 자신감! 내가 어떠한 결정을 하더라도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실 거라는 부모님에 대한 믿음이 나의 자존감을 높여준 것 같다. 참 감사하다.
나도 이런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으누의 성장을 지켜봐 주리라 다짐한다. 으누에게 말 한마디라도 '넌 뭐가 되려고 그러니?'가 아닌, '넌 분명히 잘 될 아이야'라는 씨앗을 심어주어야겠다. 아이에게 높은 자존감을 바라지 말고, 높은 자존감으로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으누가 살았으면 하는 삶의 방향으로 그저 내가 묵묵히 걸어가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