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를 처음 만난 건 21년 전 일본 무역회사 면접 때였어요. 일본 친구의 소개로 면접을 보게 됐는데 그 회사는 오피스에는 일본인들만 일하고, 창고에는 미국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죠. 일본에 본사를 둔 코마쯔의 불도저 자재를 수입해서 납품하는 회사였어요.. 내 면접관이었던 매니저 K는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가 일본인인 혼혈로 한국말도 할 수 있었죠.
K는 연예인 같은 외모에 내가 한국인이라 무척 반가워하는 눈치였어요. 다른 직원들과는 일본어로 얘기했지만 저하고 얘기할 땐 한국어로 얘기했고 전 대학교 때의 2개월 일본 연수와 일본인 룸메이트와 2년 살았다는 경험으로 일본어를 기억해 내며 퇴근 후에는 매일 일본 드라마를 봤어요.
저 때문에 회의 때 영어로 하는 게 미안해서 키무라 타쿠야 주연의 드라마를 섭렵한 몇 달 후 저는 회의 때도 일어로 발표를 하고 일본에서 오는 전화도 일어로 받을 수 있게 됐죠.
K는 워킹비자인 H1 Visa를 바로 내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워낙 바쁜 그였기에 그 약속은 빨리 지켜지지 않았어요. 입사 한 달 째였나 K는 갑자기 일본으로 출장을 가버렸고, '에어 누끼'라는 아주 힘든 일을 저한테 맡기고 고객도 저한테 담당하라고 가버렸어요. 우리 회사는 불도저 자재를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수입하는 회사였는데 예상이 맞지 않아 부득이하게 배가 아닌 비행기로 받아야 하는 자재를 리스트에 골라내는 작업이었는데 그런 중대한 업무를 별 교육 없이 나한테 알아서 하라고 떠아버린 K를 욕하며 동료들이 절 도와줬죠.
저는 전혀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느라 일이 익숙하지 않아 집에 가면 밤마다 울고, 갑자기 담당하게 된 고객들의 전화를 받고 ETA를 확인해 주고 진땀을 빼는 사이 고객들은 점차 저를 신뢰했어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K가 한 달 만에 출장에서 돌아왔는데 그 후로 K 대신 저를 찾는 고객 때문에 당황해하는 K였어요. K는 정말 늘 너무 바빴고 제 H 1 VISA는 깜깜무소식이었어요.
비자를 신청하겠다는 말은 수차례. 지켜지지 않는 사실에 전 너무 화가 나고 슬퍼서 점심시간 때 회사 밖을 빙빙 돌며 울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6개월이 지났을까 동료 냐짱이 사표를 내서 K 집에서 쫑파티를 하기로 했어요. K는 다른 룸메이트 2명과 애틀랜타 다운타운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남자 셋이 사는 집 같지 않게 정말 깔끔하고 인테리어도 멋졌어요.
K는 직접 요리를 했고 계속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전 냉장고 옆쪽에 붙어 있는 남자들의 반나 사진들을 보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어요.
“ K!, 여기 여자 사진이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남자 나체사진들을 붙여 놨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리사짱이 “ 혜영영, which one is your style?” 하고 사진을 보며 묻는 거예요.
다른 직원들은 모두 저를 쟈스민상이라고 불렀지만 리사짱만 제 한국이름에 영을 더해서 혜영영이라고 불렀어요.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누구누구 씨처럼 상, 짱을 꼭 붙이거나 애칭을 꼭 만들어서 부르더라고요.
저는 “I like this guy” 했고 K는 부엌에서 저를 쳐다보고 있었죠. 리사짱은 계속 저한테 말을 걸었고 제 궁금증은 가시지 않았는데 다음날 다른 동료 케이꼬 상과 한국 마트 ‘창고’에 가서 장을 봤는데 케이꼬상이 저한테 묻는 거예요.
“쟈스민상, you really don’t know?”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케이꼬상은 저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죠.
“K sang is a gay”
저는 “ What?? I had a no clue”
케이꼬상은 아니 그렇게 명백하게 보이는 걸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의아해하더라고요.
알고 봤더니 K의 일어 엑센트는 완전한 여자 말투였더라구요. 제가 일어를 하지만 그게 남자 말투인지 여자말투인지 까지 알아보지는 못했나 봐요.
K는 일본에 살고 있었지만 어릴 때 종종 부산에 가서 할아버지한테 한국말을 배워서인지 한국말은 부산 사투리에 할아버지들이 쓰는 말투였어요. 영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배워서 영어도 오스트레일리아 억양이 있었죠. 일어는 여자 말투에 한국어는 부산 사투리와 할아버지 말투 그리고 영어는 호주 억양이 있는 참 다이내믹한 사람이었어요.
K는 유일한 한국인인 나에게 한국인은 고지식하다는 편견이 있어서인지 저한테만은 자신이 게이인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았었나 봐요. 당연히 일본인 동료들은 다 알고 있었죠. 가짜 여자친구를 만들어서 저한테 자랑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1년이 지나서인가 K는 캐나다 토론토 지사로 발령이 났고 더 이상 제 매니저도 아니었고 우리는 동갑이어서 친구를 하기로 했어요. K가 캐나다로 간지 수개월이 지났고 애틀랜타로 왔을 때 리사짱과 세 명이서 만났는데 그는 저한테 꼭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자신이 게이인 것을 밝히려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전 이미 1년도 넘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그걸 듣고 제 표정관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워낙 얼굴에 모든 게 다 드러나는 저라 저는 K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피하기 위해 리사짱이 화장실에 가면 같이 따라가고 결국 캐빈은 저한테 얘기를 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 K가 싸이월드 친구를 저한테 신청했는데 그 프로필 사진이 자신의 남자친구와 백허그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어요. 그렇게 캐빈은 저한테 자신만의 방식으로 커밍아웃을 했죠.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게이가 K였었는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요.
남편의 회사가 갑자기 텍사스로 이전을 하는 바람에 저희는 어쩔 수 없이 애틀랜타와 달라스에서 2주마다 만나는 주말부부가 되었는데 남편이 텍사스로 간 후 몇 달 후 전 임신인걸 알게 됐어요.
결혼 후 처음 마련한 우리의 첫 집에서 남편은 2개월도 채 못 살고 텍사스로 가게 되었고 저는 혼자서 그 텅 빈 집을 지켜야 했어요. 그런데 임신 4개월쯤 전 복통으로 조퇴를 하고 집에 있는데 새벽에 하혈이 시작되었어요. 대학교 때 룸메이트이자 저를 일본 회사에 소개해준 케이꼬가 애틀랜타에 살고 있었기에 케이꼬에게 전화를 했지만 케이꼬는 잠결이었는지 제가 응급실에 가야 한다고 하자 잘 갔다 오라고 전화를 끊더라고요. 전 배를 움켜쥐고 혼자 운전대를 잡고 겨우 겨우 응급실에 도착했죠.
의사는 아이가 유산된 거 같다고 했고 전 의사를 쳐다보며 혹시 쌍둥이면 한 명은 살아있는 거 아닐까 하는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남편에게 전화했지만 새벽이어서 받지 않았고 케이꼬는 잠에서 깼는지 병원에 달려와서는 자기가 잠이 취해서 말을 잘 못 들었다고 울먹이더라고요.
남편과 다음날 아침 통화가 됐고 남편은 당장 애틀랜타로 달려오고 싶었지만 바로 티켓을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때 K가 자신의 비행기 마일리지로 남편의 티켓을 사주더라고요. 리사짱이 캐빈에게 연락을 한 건지 지금은 기억이 어렴풋해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K가 사준 비행기 티켓 덕분에 남편은 바로 다음날 절 보러 올 수 있었죠.
딱 20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고마움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어요. 그다음 해에 저는 달라스에 있는 삼성에 취직을 하게 되고 애틀랜타를 떠나왔고 K는 몇 번의 헤어짐 후 남자친구와 여객선에서 멋진 결혼식을 올렸어요. 제가 회사를 나온 후 몇 년 후 그도 다른 회사로 옮겼던 것 같아요. 그때 저한테 커밍아웃하려고 만났던 애틀랜타의 만남 후 다시는 K를 만날 수 없었지만 우리는 크리스마스 카드도 서로에게 보내면서 가끔 소식을 전하는 친구로 남아 있어요.
캐나다 벤프에 놀러 가서 올린 페북 사진을 보고 자기가 있는 퀘벡에는 오지 않아 섭섭해하는 K가 그립네요. 언젠가 정말 퀘벡에 있는 케빈을 보러 가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회사의 보스로 만나 친구가 되었고 20년 넘게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제가 가장 절실한 도움이 필요했을 때 한 줌의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준 그날의 K는 아마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전화 편 너머로 목소리만 들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