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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에달리 May 10. 2023

엄마에게 이혼을 권했다

엄마와 ESG - 엄마는 내가 좋아, 아빠가 좋아?

아빠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조용히 자는 척을 하곤 했다. 까딱 잘 못 걸렸다간 이미 먹은 저녁밥을 한 번 더 먹는 것은 물론이고, 오붓하고도 심오한 부녀의 대화를 몇 시간씩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고 한창 머리가 커버렸던 나는 아빠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집 유일신이던 아빠가 마냥 미웠다. 태산같이 큰 아빠가 어느덧 한 발로 성큼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작아 보였다.



일방적인 사랑과 술주정에 귀가 먹먹해진 날, 불쑥 그러나 태연하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제 엄마의 행복을 찾자! 이럴 거면 이혼하고 따로 사는 게 좋지 않겠어?’


엄마는 질겁하며 말했다.

‘큰 일 날 소리 하고 있어, 이혼은 무슨 이혼이야!”

그러면서 덧붙이길, “엄마는 이혼은 안 한다, 뭣보다 딸들 결혼할 때, 아빠자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라고 얘기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는 윤XX 말고, 엄마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다.


딸들을 위해 아빠의 자리를 지켜준다니, 그럴 필요 없는데 엄마는 왜 스스로를 희생할까?


내 딴에는 엄마가 스스로의 행복을 찾길 바랐기에 용기를 담아 질러버린 말이었다.


한편으론 내가 다 커서 엄마를 위해 이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이런 딸이 어딨겠어? 하며 대견하기도 했다.



내가 아빠를 미워하는 만큼 엄마도 아빠를 미워하는 줄로만 알았다.


치기 어린 대학생 시절을 지나 이제는 엄마, 아빠를 조금은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갑작스럽게 아빠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야말로 결혼식이 아니라 당장의 대학교 졸업식도 자리를 채울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너네 때문에 버티고 같이 사는 거지’, ‘엄마는 이제 아무 기대가 없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엄마였다.


그러나 대학교 학사모를 씌워 드리는 순간, 아빠의 졸업식 때가 생각나신다고, 학사모  아빠의 모습이 참 똑똑해보였노라고 했다.


요즘도 길을 걷다 예쁜 꽃을 보면 엄마는 이게 무슨 꽃이냐고 물어본다.

우리도 모른다고 대답하면, 왜 모르냐고, 너네 아빠는 다 알려줬는데, 한다.


맞다. 아빠의 장거리 운전이 심심할까 봐 아무 이유 없이 옆자리에 앉아 주는 것도 바로 엄마였다.




이혼을 권하던 딸에게 ‘세 딸들이 시집갈 때 아빠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엄마였지만 사실은 아빠의 자리보단 엄마의 옆자리가 채워있길 바란 거였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는 이미 엄마 아닌 윤XX의 행복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이제는 다시 생각해 본다.

딸들은 알 수 없는 그들의 역사와 기억 말이다.



이혼을 권했던 나는 아마도 “내가 좋아? 아빠가 좋아?”하며 유치하게 물어보는 딸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묻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저 엄마는, 엄마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태연하게 내가 좋다고 대답해 준 것일 뿐이었다.



딸들에게 영향은 받겠지만서도 엄마의 삶을 오롯이 살고 있었다. 나는 많은 것들을 엄마와 나눌 수 있지만 엄마의 세계를 넘어서 권유할 수 있는 것들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내 딸에게 이혼을 권유받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때가 오게 된다면, 엄마는 네가 아니어도 아빠가 꼭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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