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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에달리 May 28. 2023

엄마, 이번에는 엄마가 틀렸어.

엄마와 ESG : 내 삶은 엄마와 뜻이 맞을 수 없다.

힘들다고 다 그만두니? 엄마도 처음에는 그랬어.
회사는 원래 힘든 거야. 좋은 곳이잖아. 그래도 다녀봐.

여러 날을 숨죽여 울다가 더 이상 울 곳이 없어서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허락되지 않은 퇴사를 ‘질러버린’ 후, 나는 더 넓고 괜찮은 세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엄마가 틀렸다.



아르바이트와 인턴 등 여러 일을 경험해 봤던 탓일까? 혹은 당연히 나라면 어디서든 직장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탓일까?

집과 참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겁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고 그저 젊음 하나만 살뜰히 챙겨서.

작은 공공기관은 “신이 숨겨놓은 직장” 또는 “아랫사람만 계속 바뀌고, 윗사람만 남아있는 직장” 둘 중 하나라던데, 그만 복불복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여기는 대학을 갓 졸업한 병아리가 다닐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몇 개월을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지내면서, “처음이라 그럴 거야. 처음이라 힘든 거야”라고 스스로를 도닥였다. 어른들은 모두 말한다. “일 할 수 있는 것에, 돈 벌 수 있는 것에 감사해!”


열심히 일했다. 지하철에서도 노트북을 켜서 보고서를 썼다. 상사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10번씩 서류를 반려당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배시시 웃으며 죄송하다고 ‘씩씩하게’ 다시 문서를 챙겨 오는 것뿐이었다.


일은 영 모르겠는데 ‘담당자니까 네가 해야지’하며 모든 권한과 책임을 받아버린 탓에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일과 사람, 돈 셋 중에 하나만 만족해도 그냥 다닌다는데, 그 당시 나는 돈은 모르겠고, 그냥 콱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일도 힘들고, 그만두면 안 되나? 친척집에 사는 것도 불편하고”

슬쩍 엄마에게 물어보니 엄마는 말한다.

“힘들다고 다 그만두니? 엄마도 처음에는 그랬어. 원래 힘든 거야. 좋은 곳이잖아. 그래도 다녀봐”


한 번 더 하소연을 했더니 “그렇게 쉽게 그만두면 다음에는 어떡할 거냐”고 진심 어린 걱정을 받게 되었다.

여러 날을 숨죽여 울었다. 더부살이 처지 속 울 곳이 없어서 퇴근을 하면 화장실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눈물이 흘렀다. 더 이상 어른들에게 회사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18년 3월 22일, 입사 후 9개월. 나는 더 이상 가족들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사표를 내 버렸다


그즈음 나의 검색 목록은 ‘죽고 싶다’와 ‘퇴사하는 법’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요즈음도 회사가 괴로워서 안 좋은 선책을 하고 말았다는 기사를 많이 접하곤 하는데, 그 당시의 내가 딱 그랬다.

나는, 살고 싶었다.


엄마는 내 상황을 알 수 없다.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서 진심 어린 걱정을 할 뿐이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빠질 상황을 염려한다. 특히 어머니들은 시대상황상 당연히 사회생활 또는 이직 경험이 많이 없기 때문에 아마 견디라고 말할 것이다. 불확실한 것보다 확실한 것이 좀 더 덜 위험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의 말이 틀렸다. (또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다르다.”)

나는 내가 직면한 나의 세계를 스스로 밟아지나가야 한다. 옳고 그름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엄마의 걱정과 허락이 아니다.

엄마와 [상생하고 협력하고 공존한다]는 의미는 엄마와 [‘잘’ 지내야 한다]와 같지 않다.


잘 지내다는 말은 ‘화목하게 지내다.’라는 용례로 쓰인다.

이때 화목하다는 서로 뜻이 맞고 정답다는 의미인데, 진실은 이렇다 :

내 삶은 엄마와 뜻이 맞을 수 없다. 엄마의 삶도 그렇다.



내 삶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부모님에게 가족에게 물음으로써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말자. 계속 가족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기대고 싶다는 것의 반증이다.

엄마는 엄마의 몫을 살고, 자식은 자식의 몫을 사는 것이다.

놀라 쓰러질 수도 있지만 뜻이 맞지 않을 때는 사후 통첩을 하자. 다음 직장이 더 좋거나 또는 이번 시련이 지나가면 엄마는 당연히, 진심으로 자식보다 더 기뻐하시며 그제서야 눈물짓는다.


내 삶과 엄마의 뜻이 다르다면, 정답지는 나에게 있다.

엄마도 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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