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보다는 집을, 사람이 많은 곳보다는 적은 곳을 더 좋아하는 딸. 그런 딸을 불러내서 흔히 말하는 '핫플레이스(Hot Place)'들을 탐방하는 일이 우리 엄마의 소소하고 귀여운 취미 중 하나. 가끔씩은 엄마와 내 영혼이 바뀐 건 아닐까 싶어. 어둡고 무거운 나의 영혼보다는 싱그러운 엄마의 영혼이 이십 대의 몸속에 담기는 편이 더 낫지는 않을까.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 여느 때처럼 즐거운 얼굴로 새로운 핫플레이스를 찾아온 엄마는, 나의 손을 이끌고 익선동에 갔어. 조그마한 한옥의 처마 아래로 하늘을 가르는 햇빛이 떨어져 내리는 게 참 좋더라. 삼십 분을 조금 넘게 기다려서 우리는 유명하다는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지. 엄마, 사실 나는 만두를 안 좋아해. 친구들이 가자고 매달려도 싫어하는 음식은 절대 안 먹는 나인데. 그래도 엄마가 좋아했으면 싶은 마음에 그 식당에 간 거였어. 엄마는, 내가 만두를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배를 채운 우리는 좁은 골목길들을 이리저리 걷고, 멈춰 서고, 또 걷다가. 어느 오락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어. '이제는 엄마 눈치 보지 말고 오락해도 괜찮아요'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오락실을,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가려니 왠지 웃음이 나오더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게임기 앞을 서성이던 엄마는 테트리스 기계 앞에 멈춰 섰지.
"엄마가 대학 다닐 때 테트리스를 진짜 잘 하는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 생각이 나네. 엄마는 잘 못했었어. 그때 그 선배 따라서 오락실에 진짜 많이도 갔다."
나는 멈칫거리는 엄마를 부추겨서 테트리스 기계 앞에 함께 앉았어. 언제 망설였냐는 듯, 엄마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열심히 게임에 몰두했지. 떨어져 내리는 조각들을 이리저리로 움직이고, 줄을 맞추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활짝 웃고. 분주히 움직이는 엄마의 손놀림이 참 낯설더라. 더 이상 조각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을 때 내가 마구 웃음을 터뜨리자, 웃지 말라며 속상해하는 엄마의 모습까지도.
엄마, 엄마도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 엄마는 아니었잖아. 너무 당연한 사실인 걸 나도 잘 아는데. 자꾸 잊어버리게 되네.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고, 친구이고, 여자인데. 왜 나는 엄마를 엄마로밖에 대하지 못하는 걸까. 엄마가, '엄마'가 아니었을 때의 모습은 어땠을까. 머릿속에서 마구 질문들이 피어났어.
엄마, 엄마는 어떤 대학생이었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화장을 하고, 어떤 친구들과 어떤 노래를 즐겨 들었어? 아빠 말고 다른 남자들이랑은 데이트 많이 해봤어? 그때는 어떤 데이트 코스가 정석이었어? 엄마를 설레게, 아프게, 또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던 것들은 어떤 것들이었어?
왜 나는 엄마에게 이런 것들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을까. 청춘을 지나 '엄마'가 된 나의 엄마는, 그때가 그립지는 않을까. 엄마의 청춘을, 젊음을 야금야금 빼앗아가며 어른이 된 나는, 제대로 어른이 되기는 한 걸까.
엄마, 우리 다음 생에는 엄마랑 딸 하지 말자. 내가 엄마로 태어나는 건 너무 자신이 없거든. 그래서 바꿔서 태어나자는 말은 립서비스로라도 차마 못 하겠네. 그 대신에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에는 우리 친구로 태어나자. 부끄럽고 어린 기억까지도 모두 나누고 있는, 눈빛만 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친구 사이로. 그러면 내가 엄마의 가장 예쁜 순간을, 가장 좋은 카메라로, 가장 아름답게 담아줄게. 나랑 약속하는 거야,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