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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파니 Oct 19. 2023

나의 첫사랑 소환귀 (25)

25화. 생전의 기억






   

휴대용 레코드 플레이어와 앤디월리엄스가 환하게 웃고 있는 LP커버를 찬찬히 흝으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오늘 일처럼 떠올리던 금식은 베란다 통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둠이 깊었다. 등을 켜지 않았음에도 2층 거실이 은은히 밝았다. 달빛 덕분이다.

금식은 어머니의 유품들을 꺼냈던 박스 안으로 차곡차곡 넣었다. 레코드 플레이어와 LP판, 순희에게 주기로 한 스킨, 로션등 어머니 화장품만 빼고. 금식은 레코드 플레이어 위에 LP판, 화장품 순으로 쌓은 뒤 ‘끙’ 소릴 내며 들고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첫 계단을 내려 밟으려던 발이 머뭇댔다. 금식은 소라가 잠들어 있는 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망설이던 발은 자석에 이끌린 듯 방을 향했다.

방안도 거실과 같이 창가로 새어든 달빛에 어둠이 옅었다. 무너진 박스 더미 한가운데 자릴 잡은 소라는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금식은 두 눈에 명확히 보이는 그녀가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444-4444’ 생각만 해도 섬뜩한 번호로 이름 세 번 불렀다고 저승에서 진짜로 소환될 줄이야. 게다가 그 옛날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에 피칠갑을 한 끔찍한 몰골로. 산 것도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그녀를 바라보는 금식의 표정이 심란했다.

"올해 장가간다!"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이리라.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은. 수봉의 주선으로 시작한 소개팅만 99번. 올해도 두 달 밖에 안 남았으니, 오지게 급하긴 했나 보다, 금식은 생각했다.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이제 얘를 어쩌나?" 중얼대는데 소라가 가냘픈 몸을 부르르 떨며 얕게 신음했다.

10월, 가을밤은 제법 쌀쌀했다. 금식은 손에 든 레코드 플레이어를 방문 앞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머리맡, 창가에 쌓아둔 박스 더미로 발끝을 세워 다가갔다. 4단으로 쌓인 맨 위 첫 번째 박스를 열고는 조심스럽게 뒤적였다. ‘부스럭, 바스락, 사라락.’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뒤적이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첫 번째 박스 안에는 금식이 찾는 것이 없었다. 박스를 끌어 안 듯 들어 바닥에 내리던 금식은 “아오.... 더럽게 무겁네....”라는 말을 반사적으로 꿍얼댔다. 눈살을 구기며 두 번째 박스를 최대한 소리 죽여 개봉했다. 순간, 금식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녀를 돌아봤다. 번잡스러운 소리에 깰 만도 한데 그녀는 그딴 소리에 질 수 없다는 듯 꿋꿋이 잠을 지켰다.

두 번째, 세 번째, 박스에도 금식이 찾는 것은 없었다. 가장 밑에 깔린 4번째 박스를 개봉하니 그토록 찾던 네이비색 롱패딩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애타게 찾는 건 왜 항상 맨 끝에 나타나는지. ‘아흐!’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린 금식은 롱패딩을 길게 펼쳐 들고 더욱 조심스럽게 소라에게 다가섰다. 허리를 바짝 숙여 그녀의 가녀린 다리부터 어깨까지 살금살금 패딩을 덮어 올렸다. 그러다 소라의 얼굴에서 섬찟, 멈췄다. 긴 생머리에 덮여 얼핏 보이는 피칠갑된 왼쪽 얼굴은 여전히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그랬지만 그럼에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오똑한 콧날과 작고 붉은 입술에 금식은 묘하게 설렜다.

오싹하면서 설레는 감정이라니. 금식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어섰다. 그리곤 레코트 플레이와 그 위에 올린 lp판과 화장품들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소라는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번 떨림은 경련에 가까웠다. 신음 소린 한층 깊고 길었다. 굳게 닫힌 눈꺼풀 안에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뒤룩거렸다. 소라의 꿈속은 마구 침범한 어떤 기억들로 혼란스러웠다. 신생아나 다름없는 소라에겐 난데없이 들이닥친 기억들이 끔찍한 악몽 같았다. 두려운 소라는 경련하고 신음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생전의 기억 때문이었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 소라를 보며 함박웃음 짓는 아빠와 엄마의 모습으로 시작된 생전의 기억이 한 편의 영화를 보듯 펼쳐졌다.


개척교회 목사였던 아빠는 궁핍한 생활에도 자상함과 인자함을 잃지 않은 따듯한 사람이었다.

엄마도 아빠 못지않게 자애로웠다. 그런 부모님 사이에서 소라는 살갑고 배려심 깊은 아이로 자랐다. 성격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속 쌍꺼풀 진 크고 동그란 눈, 날렵하고 오똑한 코, 작고 얇은 입술, 갸름한 턱선, 엄마의 미모가 고스란히 담긴 어린 소라의 얼굴은 한마디로 인형 같았다. 아빠는 엄마와 소라를 보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빠는 배가 고프다가도 엄마랑 소라만 보면 배가 불러.” 그러면서 바짝 마른 아랫배를 애써 부풀렸다. 아빠의 익살스러운 행동에 엄마와 소라는 배꼽을 잡았다. 이 시기, 엄마는 소라와 함께 교회 마당, 입구 옆 화단에 묘목 세 그루를 심었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어떠한 시련에도 가족의 사랑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아빠는 전도를 나갈 때면 소라를 데리고 다녔다. 소라의 인형 같은 얼굴이 사람들을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책을 펼치면 대부분 정색을 하고 뒷걸음질 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라는 아빠랑 동네를 거니는 게 좋았다. 길에는 옷가게, 문방구, 오락실등 구경만 해도 신나는 것 투성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소라를 정말 신나게 한 건 아빠의 무등이었다. 전도를 마치고 교회로 돌아갈 때면 아빠는 항상 무등을 태워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라는 그게 무척 신나고 즐거웠다.


소라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뒤, 엄마는 호들갑을 떨며 소라와 아빠를 화단으로 불렀다. 엄마와 소라가 심었던 묘목 세 개가 서로의 몸을 맞대어 한그루 인양 자라고 있었다. 소라는 너무나 신기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마는 이런 나무를 연리목이라고 한다며,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같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0년이 흘렀지만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연리목을 가꿨다. 그래서일까. 긴 가난에 부모님의 금술에 금이 갈 만도 한데, 중학생이 된 소라 앞에서 서슴없이 뽀뽀하고 포옹하는 등 변치 않는 애정을 과시했다. 소라는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그런 두 분의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시련 앞에 더욱 단단해지는 부모님의 사랑을 보며 소라는 연리목 덕분인가 했지만 신께 감사를 돌렸다.   


소라가 고등학생이 되자 드디어 신의 축복이 임했다. 휑하던 작은 예배당이 부풀어 터질 만큼 신도들이 몰려들었다. 부모님은 이제 됐다며 소라의 손을 잡고 목메어 울었다. 소라도 울며 신께 간곡히 기도했다. 이 행복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번성했다. 부모님을 도울 집사, 전도사님들도 눈에 띄게 늘었다. 소라도 청년부를 맡아 부모님을 도왔다. 청년부는 소라의 미모에 환장한 남 청년들로 넘쳤다. 하지만 그녀는 정확히 선을 지키며 청년부 활동에만 집중했다. 그런 소라의 마음을 기어이 얻는 데 성공한 이는 세 살 많은 신학대생 오빠였다. 소라는 아빠와 똑 닮은 오빠의 성품에 마음을 열고 말았다.

소라는 오빠와의 교제를 부모님께 고백했다. 떳떳하게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감해하던 부모님은 소라를 믿고 교제를 승낙했다. 이후로 오빠는 소라와 건전한 교제를 이어가며 물심양면, 교회 일에 힘썼다. 오빠의 노력이 가상했던지, 부모님도 의심을 접고 마음을 열었다. 특히, 아빠는 아들처럼 대하며 가까이 했다.

신의 은총 아래 교회는 풍족했고 부모님의 허락 안에 연애는 달콤했다. 소라는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불안할 정도로.


소라가 고3이 될 무렵, 숨죽여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불안은 발톱을 드러냈다. 궁핍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었던 아빠, 엄마의 사랑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아빠는 더 많은 신도를 받기 위해 교회를 담보로 무리한 증축을 하려 했고, 엄마는 이를 반대했다. 신도들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며. 아빠는 물들어 올 때 노 저어야 한다, 두당 헌금이 얼마인지 아냐고 소리쳤다. 아빠의 격앙된 목소리가 목사실 문을 뚫고 맡은 편 방에 있던 소라의 귀에 꽂혔다. 소라는 귀를 의심했다. 아빠에게 신앙은 이제 사업이었다.

같은 문제로 다툼이 잦아지다, 격분한 아빠는 끝내 엄마의 뺨에 손찌검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소라가 보는 앞에서. 믿기지 않았다. 긴 가난과 온갖 시련에도 따듯함을 잃지 않은 아빠였는데. 소라는 소름이 돋았다.

엄마는 반격하듯 이러고도 당신이 목자냐며 가증스럽다고 악을 섰다. 아빠는 또다시 손을 높게 쳐들고 엄마의 뺨을 조준했다. 소라는 그런 아빠를 가로막았다. 아빠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아빠는 야비한 미소를 짓고는 치켜 올린 손을 거뒀다.


이 날 이후로 엄마를 향한 아빠의 폭력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폭주했다. 첫 한번이 힘들지 그 다음은 쉬웠다. 횟수와 강도가 나날이 위력을 더했다. 폭력은 엄마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말리는 소라에게도 가차 없었다. 소라를 부둥켜안은 엄마는 아빠의 발길질을 온몸으로 막았다. '퍽! 퍽!' 엄마의 몸이 내지르는 둔탁한 비명을 들으며 소라는 떠올렸다. 어릴 적 아빠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아빠는 배가 고프다가도 엄마랑 소라만 보면 배가 불러.”      


소라의 졸업식을 앞둔 어느 날, 엄마는 멍한 눈으로 연리목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소라는 종일 그러고 있는 엄마를 예배당 창가에서 주시하며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노래가사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늦은 밤, 엄마는 홀연히 교회를 떠났다. 소라는 엄마의 행동이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원망스러웠다. 미어지는 가슴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연리목에 기대어 눈물을 게워내는 것뿐이었다.      


신도들이 슬슬 엄마의 빈자릴 물었다. 아빠와 소라는 미소로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했다. 그러자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다. 그러다 추잡한 소문 하나가 진실인 양 신도들의 입을 타고 돌았다. 전도를 핑계로 여러 남자와 바람을 피우던 엄마가 결국, 들통이나 가족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다는. 모든 이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엄마의 선의가 남자 신도들한테만 유독 여우짓에 꼬리를 쳤다는 악의로 둔갑했다. 신도들은 하나님을 믿듯 조금에 의심도 없이 소문을 믿었다. 엄마의 외모가 그 증거였다. 마음씨 보다 얼굴이 더 곱다며 침이 마르게 칭찬할 때는 언제고. 인물값을 할 줄 알았다고 혀를 찼다.    

소라는 치를 떨었다. 소문의 진원지가 누구인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어떤 놈이던 잡히면 정말 죽일지도 몰랐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놈을 알아낸 순간, 소라는 숨이 턱 막혔다. 그 죽일 놈은 오빠였다. 무슨 근거로 그런 소문을 냈는지, 소라는 핏발 선 눈으로 오빠에게 따져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자신도 들었다는 비루한 변명이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악을 쓰며 물었지만 오빠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동정의 대상 된 아빠는 가련한 피해자 행세를 하며 소문을 악용해 교회 증축에 필요한 헌금을 걷어 들였다. 소라는 확신했다. 엄마를 문란한 여자로 만든 자들이 누구인지.

똑 닮은 아빠와 오빠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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